한국경제의 성장-월남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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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미국원조와 1950년대 한국경제의 성장

2.베트남 파병 배경과 과정
(1)베트남 파병의 배경
(2)베트남 파병의 과정

3.베트남 파병의 원인
(1)외교적 요인
(2)정치적 요인
(3)경제적 요인

4.베트남 전쟁이 세계경제에 미친 영향
(1)미국 호황의 지속
(2)일본 고도성장의 지속

5.베트남 파병이 한국경제에 미친 영향

6.결론 / 느낀점 참고문헌 / 자료

본문내용

건데 지난 1965년 파월 기술자 93명이 월남행을 한 이후 1966년(1만 20명)부터 월남행 골드러시가 본격화됐다. 많을 때는 민간인들만 2만명에 달했다. 이로 인한 외화 전체 가득액이 한해 평균 1억 2천만 달러에 달했었다.
우리 기술자들은 대부분 세탁-군복-시계-카메라 수리 등 주월 미군과의 각종 서비스계약을 맺고 외화벌이에 나섰다. 수출 상품 중에는 손톱깎이가 유독 인기였다. 군번줄과 손톱깎이를 함께 차고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도 많았었다.
그러나 너도 나도 월남으로 몰려가다보니 중요한 기술자들이 국내에서 사라지는 ‘기술자 기근’ 현상의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1968년도 서울시에 등록된 불도저-트랙터-트레일러-롤러 중기기사는 1백 58명이었는데, 이와 같은 수치는 불도저(1백 65명) 등 9백 93명의 중기기사가 나가있던 월남의 6분의 1수준에 불과함으로써 국내 기술자 기근이 얼마나 심각케 했는가를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한편 재벌기업이 처음 등장했던 때도 월남특수 기간이었다. 한진-현대-경남기업-대한통운-대림산업 등 5개 건설회사는 베트콩의 테러위협을 무릎 쓴 결과, 일약 일류급 대기업으로 발돋음하는 기회를 잡았다. ‘월남상사’로 불리었던 한진상사(현 한진그룹)의 경우 군수물자를 베트콩이 우글거리던 정글을 뚫고 트럭으로 직접 실어 날라 해상수송을 고집하던 미군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의 산업화 내지 공업화 과정에서 베트남 특수가 수출의 확대, 외자 및 기술도입의 촉진, 정부 역할의 주도성, 신흥 재벌 형성 등을 야기하였으며, 특히 신흥재벌인 현대, 대우, 삼성, 한진 등 굴지의 거대기업이 출현 성장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그러나 베트남 특수도 1971년 말 청룡부대의 귀국을 시작으로 퇴조를 맞이하게 됨으로써, 1973년 봄 사실상 막을 내렸으며, 이후 우리 기술자들의 무대는 서서히 중동으로 옮겨졌다. 정글전이 사막전으로 바뀌어가는 순간이었고, 이른바 중동특수가 막을 올린 것이다.
결론적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직접 참가하게 됨으로써 정치, 외교, 군사적으로 많은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었고,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보다 결정적인 유익을 도모한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혹자들은 단지 외화 10억 달러 때문에 젊은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군사정권의 위상확립을 위한 청부파병이었다고 입에 담지 못할 비판을 하지만, 만약 그 당시에 한국이 베트남 파병을 하지 못했다면 결코 오늘의 OECD회원국이나 선진국의 문턱 진입의 밑거름인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고 말았을 것이며 우리의 국력신장과 국가발전은 계속 제자리걸음을 함으로서 영원히 개도국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월남전 파병은 정치경제군사적인 측면에서 우리에게 몇 가지 의의를 남기고 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사상 처음 우리가 해외에 군대를 보내 한국전쟁 때 미국에 진 빚의 일부를 갚았다는 점과 아시아의 집단 안보에 동참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군사적으로는 이를 통해 국군 현대화와 전력증강을 기할 수 있었으며, 특히 32만명에 가까운 병력이 전투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북 실전전력의 우위를 견지할 필요조건이 되고 있다. 또 경제적으로는 ‘브라운 각서’에 의한 ‘월남 특수’를 통해 고용증대와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산업사회의 기반형성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 반면 우리는 미국의 권유와 불가피한 선택으로 비롯된 월남전 참전을 계기로 5천여 명에 달하는 장병의 전사자와 1만여 명의 전상자를 냈고, 또 다수의 서방국가들로부터 무모한 참전이었다는 비난도 받았음이 사실이다.
특히 월남전에 참전한 장병과 근로자들이 남기고 온 현지인 2세(속칭 ‘라이 따이한’) 문제와 고엽제 피해 그리고 용병론과 양민학살 주장 대두 등이 미해결 과제이자 후유증으로 상존해 있는 실정이다.
만약 박정희 정권 당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몸부림을 치지 않고서 현실 안주에 급급하여 베트남 특수를 통한 국가이익 창출을 도모하는 최선책인 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야당의 반대에 못이겨 유보 또는 파병금지의 결정을 내렸다는 과연 지금 오늘날의 우리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베트남 전쟁이 끝난지 30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베트남 파병이 한국경제에 기여한 긍정적 효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아울러 615선언을 계기로 북한 특수가 도래할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엄청난 물량의 대북공세를 폈으나 일장춘몽으로 막을 내린 시점에서, 북한의 도이모이정책 도이모이정책 : 베트남의 개방개혁정책을 말함. 베트남판 페레스트로이카로 불리어지고 있음. 86년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구엔 반 린이 강력하게 시행.
도입을 촉구하면서 지난날의 베트남 특수를 재음미함으로써 새로운 베트남 특수가 창출될 수 있는 여건 조성 노력과 함께 양국간의 고통스러웠던 베트남 전쟁 기간 중의 상처를 치유하는 획기적 계기가 마련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자료

한국은행, 『한국의 국민소득 1953~63』, 1965

井村喜代子, 1988a,「ベトナム戰爭と高度成長の再現破綻」(上),
『三田學會雜誌』, 第81卷 第3.

통계청, 국가별 수출액수입액 추이

International Policy Report, Vol.1 No.2, 1975

신승권, 한국의 베트남 개입의 정치 경제적 의미, 1992

한국은행, 『경제통계연보』, 1971, 1978.

경제기획원, 주요경제지표, 1975

이대근, 한국의 경제발전과 베트남전쟁, 1993

朴根好. 1993, 『韓國の經濟發展とベトナム戰爭』, 御茶の水書房

통계청, 금외환보유액 및 국제통화기금

외무부, 1960년대의 한국외교. 1971

재무부 외(1988) : LBJ 도서관 문서들

U.S Oversea Loans and Grants and Assistance from International Organization, Mason and Cole eds, 1980,

경제기획원,『한국통계연감』, 1970,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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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11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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