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중상주의와 콜베르티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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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괄

Ⅱ. 중세적인 면모를 벗는 프랑스 : 백년전쟁과 종교전쟁

Ⅲ. 콜베르티즘 성립에 영향을 준 인물 : 쉴리, 리슐리외, 마자랭
1. 쉴리
2. 리슐리외
3. 마자랭

Ⅳ. 전(前)콜베르티즘 시기 경제정책에 있어서의 주요 화두(話頭)
1. 간접세
2. 국가와 생산자 집단의 제휴
3. 관세 장벽
4. 정부 공채
5. 관용

Ⅴ. 콜베르티즘
1. 중상주의
2. 프랑스의 중상주의
3. 대표적인 콜베르주의자들

Ⅵ. 콜베르의 중상주의 정책의 결과와 이후의 전개과정
1. 콜베르의 업적
2. 중상주의 정책의 폐해와 원인
3. 이후의 경과

Ⅶ. 중상주의 정책에 대한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적인 접근

Ⅷ. 맺음말

Ⅸ. 참고문헌

본문내용

초래되었는데, 당시 프랑스와 전쟁(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중이었던 영국은 순군사비용이 프랑스에 비해 적었고 금은 사정이 유리(특히 금본위 지향적이었기때문에)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비해 위기감이 덜했다. 후에 은이 과도하게 축적되면서 프랑스는 시세조작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국가 구조를 약화시킨 반면, 영국은 금의 축적을 통해 상업적으로 지배하고 국가구조를 강화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Loc. cit., pp.419-420
영국의 경우 국제무역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금을 중심으로 화폐단위로 사용하였고, 금화가 부족한 경우에도 프랑스처럼 동화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어음을 사용하였다. Loc. cit., p.172
마지막으로 정치적인 면에서도 영국과 프랑스는 공통적으로 적대시하는 두 파벌(영국은 왕당파와 의회파, 프랑스는 부르주아와 귀족층)이 정치에 참여하였고, 이 과정에서 군주정은 도전을 맞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 모두 이 갈등은 궁극적으로 군주정의 승리로 끝났으나, 영국의 경우 국왕의 행정적 절대주의에서 입법상의 의회중심주의로 바뀌는 일종의 사회적 타협을 통해 의회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반면에 프랑스의 경우 왕권 강화에 따라 의회의 역할이 상실되었다. 즉 이러한 과정이 영국의 경우에서는 공화정 폐지와 왕정복고를 통해서 타협을 통해 이루어진 반면 그리고 이러한 타협을 통해 영국은 지배층의 안정화를 추구하게 되었고, 동시에 내부의 변화를 억제하고 세계경제에 속한 나머지 지역을 희생삼아서 경제 발전에 주력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Loc. cit., p.185
, 프랑스는 두 계급이 완전한 타협을 이루지 못하고 강력한 왕권(예를 들어 루이 14세)에 의해 ‘강요된 휴전’을 하여 이해관계에 있어서 완전한 타협을 보지 못하고 중간의 강력한 왕권이 부재시에는 언제든지 다시 갈등이 표면화 될 수 있었다 Loc. cit., pp.188-189
- 결국 루이 16세 때 이러한 갈등은 표면화 되어 혁명이 발발하였고, 이는 영국과의 경쟁에서 패배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표출된 것 - 고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해 1689년 이후 식민지 무역과 해군을 강조해온 영국은 세계 체제에서 중심지의 기반을 다져놓고 프랑스와의 장기적인 경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반면에 프랑스는 국내의 문제 해결에만 집중한 나머지 영국처럼 중심지로서의 준비를 소홀히 하였기에 그 이전에는 오히려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는 프랑스가 영국보다 나았다. 다만 두 국가의 경제적인 큰 차이점이라 할 수 있는 대외무역은 이러한 ‘위기의 17세기’에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으나 후에 18세기에 이르러서 세계경제규모가 팽창될때의 원동력이 되면서 영국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프랑스를 앞지를 수 있게 되었다. Loc. cit., p.160
영국과의 경쟁에서 진 것으로, 즉 결코 영국의 ‘자유주의’의 프랑스의 ‘중상주의’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강한’ 영국의 승리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적인 접근에서도 문제점은 발견된다. 즉 국내문제로 인해 세계체제의 주도권 경쟁에서 밀려난 프랑스가 주도권을 잡아나가기 시작하였던 영국과 어떻게 비슷한 경제 수준을 바탕으로 비교적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세계체제론적인 입장에서는 풀리지 않는 모순된 사항으로, 이 사항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보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모순점을 프랑스 국내의 시장확대, 국내 소비의 팽창등을 통한 생산증가와 경제발전으로 보완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다. 즉 프랑스의 재정 담당 대신들은 국외의 세계체제를 구축하여 경제성장을 이루기 보다는 국내 시장과 생산구조의 내실을 기하여 경제성장을 이루고자 했으며, 이러한 시도들은 비교적 일관성있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보다 자세한 것은 김경근, 같은책, pp.122-135를 참고하라
Ⅷ. 맺음말
위와 같이 살펴본 콜베르티즘은 단순히 콜베르 한 개인에 의해서 창안되어 실시된 중상주의 정책이 아니라 프랑스 절대주의 왕정의 진행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이러한 중상주의적인 국정운영방식이 절대주의 왕정의 성쇠와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콜베르티즘으로 완성된 프랑스 중상주의 경우는 단순히 각종규제와 정부의 시장개입·국내산업의 보호·수입억제와 수출장려를 통한 경제성장을 실시한 것이 아니라 대외무역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기술에 있어서도 주변 국가들의 선진기술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다만 지나친 정부의 규제와 조세부담이 높은 각종 간접세, 그리고 이러한 조세수입이 모두 궁정의 위엄과 사치로 대부분 쓰였다는 점, 그리고 필요성에 의해 대외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선 영국과 달리, 국내에서 생산과 소비가 모두 가능하였기에 대외무역보다는 국내의 산업과 경제성장에 주력을 다한 점이 당대의 경쟁 국가였던 영국에 뒤지게 된 원인이 되었고, 구체제의 모순과 맞물려 대혁명을 야기하였다.
하지만 대혁명이후에도 콜베르티즘의 일부 정책들은 존속하였고, 특히 콜베르식의 공업화는 나폴레옹 황제 대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Op. cit., p.406
그밖에도 시민들의 식량 확보를 위해 식량의 공급과 가격에 대한 규제는 물론 기타 여러 가지 농 공업적인 규제가 19세기까지 존재했었고, 뒤늦게 중앙집권화와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였던 다른 여러 국가들에서 콜베르티즘을 채택한 사실은 이러한 정책이 구체제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Ⅸ. 참고문헌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 2000
앙리 쎄, 17세기의 정치사상, 민음사, 1997
김경근, 프랑스 근대사 연구 : 평등과 자유를 통한 번영의 길, 한울, 1998
피에르 구베르, 앙시앙 레짐 Ⅱ, 아르케, 1999
P.블뤼슈 외, 프랑스 대혁명, 한길사, 1999
페리 앤더슨,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까치, 1997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 세계체제 Ⅱ : 중상주의와 유럽 세계경제의 공고화 1600-1750년, 까치, 1999
C.E. 라부르스, 구제도 말기 프랑스의 경제공황, 랄프 W. 그라로우 엮, 근대 프랑스 경제연구, 종로서적, 1982
김영한 엮, 서양의 지적 운동 2, 지식 산업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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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11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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