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 사상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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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화 사상과 교육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序論.

本論.

1. 개화사상과 신교육 필요성의 인식
A. 첫째 단계 [개화사상의 형성기]
B. 둘째 단계 [초기 개화사상, 1880년대]
C. 셋째 단계 [후기의 개화사상, 1890년대 이후]

2. 개화기의 신교육사상
A. 개화기 신교육사상의 형성배경
B. 개화기 신교육사상의 특성

3. 갑오개혁과 근대적 교육제도의 확립
A. 갑오개혁과 교육
B. 교육조서(敎育詔書)와 그 교육사적 의의
C. 신학제에 의한 근대학교

4. 주권침해기: 한일의정서(1904)부터 한일합방(1910)까지
A. 시대상황
B. 통감부의 교육정책과 실제
C. 교육구국운동

5. 근대 교육 및 근대학교의 설립
A. 정부에 의한 관학
B. 민족선각자들에 의한 사학
C. 선교사에 의한 사립학교

6. 개화기 사상가
A. 최한기(崔漢綺)
B. 유길준(兪吉濬)
C. 이 기(李 沂)
D. 박은식(朴殷植)

結論.

본문내용

이 3종의 교육에 있어 가정교육은 부모의 언행이 곧 자녀에 대한 교육이며, 학교교육은 문학, 정치 등 각종 교과목을 교육내용으로 하며, 사회교육은 신문, 잡지 등에 의한 홍보적인 교육활동이라고 하였다.
이기의 교육사상은 근대교육에 직접적인 큰 영향을 끼쳤을 뿐아니라 그보다 그의 많은 저술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교육의 관심 및 문제, 교육의 제도, 내용, 방법 등에 대한 선견지명이 우리의 교육 현실을 바로 보고 나아가 더 나은 교육을 위해서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D. 박은식(朴殷植)
박은식의 교육사상은 철저하게 현실과의 대응 속에서 형성·발전되었다. 그러므로 현실이 변함에 따라 그의 교육 사상도 변모되어 갔다. 그의 교육 사상의 변화는 크게 4가지의 현실상황의 변화를 전환점으로 하고 있다.
우선 1기는 신문화사조 접촉 이전의 주자학적 교육사상기(1859∼1898)이다.
이 시기는 그가 주자학에 심취되어 있던 때로 신문학을 중심으로 한 교육 사상이 나타나지 않은 체 주자학적인 범주 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즉 교육목적을 수기치인의 인격완성에 두고 유교경전과 성명을 강의·토론하며 의문점을 없애주는 방식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 2 기는 신교육 중시의 교육사상 형성기(1894∼1904)이다.
주자학적인 범주를 벗어나, 신교육 중시의 교육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로 본격적인 사회활동에 참여하였다. 이시기 그의 교육 사상은 ‘흥학설’과 『학규신론』에서 잘 반영되어 있다. 즉 교육이야말로 부국과 자립을 위해 가장 절실한 것임을 역설하면서, 국민교육과 의무교육제도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제 3기는 자강과 국권회복의 교육 강조기(1905∼1909)이다.
1905년 일제에 의한 을사조약 체결 이후부터 매우 근대적이고 급진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제 교육은 그에게 있어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상실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신지식의 적극적인 수용을 강조하는 동시에 학교의 설립과 교사양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이 시게 이르러 여자 교육을 중시하였고 체육과 함께 상무교육도 강조하였다.
제 4기는 국혼배양의 교육 강조기(1910∼1924)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서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되고 애국계몽가로서의 활동이 탄압되자, 그는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로서, 역사가로서 그리고 이주민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가로 활약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이전과 다소 다른 교육사상을 보인다.
그는 국가가 멸망한다는 것은 국혼(민족정신·민족문화)과 국백(국토·군사·경제등)이 모두 말살된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비록 국백을 잃었다하여도 국혼을 유지·배양하면서 잃어버린 국백을 찾아다가 재결합시키면 회복할 수 있다하였다.
그는 국혼배양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국사’를 가장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 역사를 통한 민족적 사기진작을 강조하였다.
제 5기는 인격완성의 교육 강조기(1925)이다.
그의 교육사상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논설인 ‘학(學)의 진리는 의(疑)로 좇아 구하라’가 발표되었다. 그는 이 논설에서 과학 및 기술의 학문과 더불어 인격수양 및 인격완성을 위한 학문을 중시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였다.
그의 교육사상은 실용적인 학문의 강조와 균등한 교육기회의 강조, 그리고 민족주체성의 강조 등을 그 기저로 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1900년경부터 서구의 교육사조, 특히 자연주의 교육사상을 수용하고 있다. 즉 그는 19세기 서양 교육사조의 일반적 특징인 아동중심의 신인문주의 교육사조·국가주의 교육사조·과학중시의 교육사조 등을 일찍부터 수용하고, 그것을 통해서 종래 교육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자학적인 요소를 완전히는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일제침탈이라는 비운의 상황 속에서 주창되어졌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들어 낸다.
結論.
한국의 근대사는 전근대적인 전통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발전하려는 움직임과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하는 움직임의 두가지 흐름으로 그 시대적 전기가 진행되는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시대 상황속에서 한민족의 움직임을 근대화를 이륙하기 위한 개화운동의 흐름으로 나타났으며, 개화운동을 서양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된 개화사상을 기반으로 해서 서양의 신문물을 수용하여 국가의 근대적 발전을 지향하던 개혁세력의 움직임이다. 개화 지식인들은 국민을 계몽하여 국력을 증진시키려는 움직임을 전개하여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고 국문과 역사를 비롯하여 신학문의 교육에 열을 올렸다. 1894년 갑오개혁 진행과정에서 교육개혁은 개혁의 추진과 함께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신학문과 기술의 수용에 있으며 또한 외세에 대항하는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한 민족적 각성이 뒤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도 대외 관계가 증대되는 상황에서 이에 대응하는 필요에 있어서도 교육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조선 정부나 민족의 선각자들은 각기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은 조금씩 틀리고 그 과정에서 현실적 수단으로 일부 외세의 힘을 이용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부국강병과 자주독립이었다. 그 과정에 있어 자주성 시비가 문제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정을 통한, 보다 진보된 결과물이 아닐까? 1853년 페리 제독에 의해 개항된 일본은 그 후로 실용적가치를 우선으로 두고, 근대화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통해 일본은 그 후 청과 러시아라는 막강한 세력을 꺾고 동아시아의 패권을 거머쥐었던 것이다.
개화기 시절 근대교육은 자주성 논란을 떠나 근대사회로 이행을 향한 첫 걸음이었다는데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대를 이끌어 간 분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현재의 우리 모습을 상상할 수 없으리라!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E. H. Carr의 명언이 의미하는 바를 심각하게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몇 백년이 흐르더라도, 개화라는 단어는 한번으로 족하다. 이젠 우리가 다른 선진국을 개화(?)하는 새로운 세계사를 만들어 봄이 어떨까?
참고 문헌
1. 김경식, "교육사, 교육신론", 교육과학사, 1996.
2. 남궁용권, "교육의 역사, 철학적 기초", 學文社, 1995.
3. 김병하, "교육의 역사·철학적 기초", 대구대출판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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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13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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