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칼빈의 성찬의 의미
■. 루터, 츠빙글리, 로마카토릭과의 비교
■.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
성찬의 목적
■. 성찬이 주는 약속의 의미
■.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타당성은...
성찬은 자주 집행하라
■.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주 회상하고...
마치는 글
■.성찬 교리에 대한 칼빈의 기여는
■. 루터, 츠빙글리, 로마카토릭과의 비교
■.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
성찬의 목적
■. 성찬이 주는 약속의 의미
■.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타당성은...
성찬은 자주 집행하라
■.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주 회상하고...
마치는 글
■.성찬 교리에 대한 칼빈의 기여는
본문내용
준수하였다. -철저히 기독론에 근거하고 있다.
5. 참된 종말론적인 긴장이 유지되었다. - 칼빈은 하늘은 이 땅에서 옮겨진 장소라는 자신의 주장을 따르면서, 승천을 더 분명하게 이 세상의 심판으로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세상 저편이 있고, 이 세상 위에 있는 운명을 가리키는 사건으로 바라본다. 앞으로 그리스도의 백성은 마치 천사들이 ‘너희들은 주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다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주님은 홀로 하늘을 차지하시려고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과 모든 신앙인들을 주님과 함께 모이게 하려고 들어가셨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 저편에서 다가올 왕국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승천은 이 세상의 한계를 초월하지만, 여전히 그 영역 속에 이 땅을 포함하고 있는 나라를 그리스도가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은 칼빈에게 단지 이 세상에서 항상 숨겨진 방식으로 현존하는 것을 보이도록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여지없이 뒤흔들고 세상을 초월하는 사건이다. 참으로 이것은 세상 저편에 있는 나라가 이 세상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정말로 저 멀리 가셨으며, 주님의 성찬 교리는 승천의 실재와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하늘의 영광과 위엄을 보호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이미 주님의 몸과 접목되어 주님의 나라의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누릴 수 없지만, 이 세상 저 편에 있을 유업을 약속 받았으므로, 계속해서 소망하며 기다려야만 한다. 따라서 칼빈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고양된 상태를 강조하고 성령의 사역을 강조함으로써, 성찬에 관한 참된 교리라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종말론적인 강조를 보존하였다.
6. 말씀에 대한 강조. - 그러므로 성찬을 거행하기 전에 설교가 선포되는 것은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말씀은 ‘선언된 것이라기보다는 이해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찬이 그 힘을 획득하는 것은 ‘알아듣기 쉽게 선포되는’ 말씀에 기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소유와 주의 영적인 선물들을 얻는 것은 빵과 포도주의 물질로 말미암은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주께 인도되었고, 주님은 스스로 우리의 것이 되시고, 믿음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이 표징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셨고 제공하시는 것을 모두 이루신다.
7. 다른 의식들을 도입함으로써 성찬의 의미를 흐려지게 해서는 안된다. - 그들이 성직의 능력과 효능이 다 떨어져서 강단에서 차갑고 무관심하게 몇 마디 말을 하였을 때, 의심의 여지없이 우상들이 기독교 성전에 들어왔다. 바울은 참된 설교에서 그리스도가 ‘분명히 보여지며, 말하자면 우리 눈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다’고 증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저주를 담당하기 위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그리고 신실하게 가르침을 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언약을 베푸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 자신을 위하여 행동하신 형식들을 훨씬 간단하게 주셨다는 사실이다. 비록 사람들이 외적인 의식들로 많은 수고를 했다고 할지라도, 하늘의 진리를 무시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권위의 다스림을 받기를 거절하는 것이므로, 그들의 불경건한 태도는 자신들의 완고한 불복종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말 것이다. 지식이 없으면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나 우상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무리 선한 의도라고 할지라도, 말씀이나 하나님의 명령이 없으면 자기들의 생각을 따르는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라고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서, 칼빈은 “이것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말씀이며 신앙적인 것은 어느 것이든지 분별없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불필요한 예배 양식을 도입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타내셨던 참된 상징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주의 교회에서 소외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히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이 내 안에 있는가? 그분의 피에 대해 나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 잔을 들고 어떤 눈물을 흘렸는가? 주님, 죄인중의 죄인, 죄인 중의 괴수가 손들고 주 앞에 갑니다. 용서하시옵소서.
5. 참된 종말론적인 긴장이 유지되었다. - 칼빈은 하늘은 이 땅에서 옮겨진 장소라는 자신의 주장을 따르면서, 승천을 더 분명하게 이 세상의 심판으로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세상 저편이 있고, 이 세상 위에 있는 운명을 가리키는 사건으로 바라본다. 앞으로 그리스도의 백성은 마치 천사들이 ‘너희들은 주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다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주님은 홀로 하늘을 차지하시려고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과 모든 신앙인들을 주님과 함께 모이게 하려고 들어가셨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 저편에서 다가올 왕국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승천은 이 세상의 한계를 초월하지만, 여전히 그 영역 속에 이 땅을 포함하고 있는 나라를 그리스도가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은 칼빈에게 단지 이 세상에서 항상 숨겨진 방식으로 현존하는 것을 보이도록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여지없이 뒤흔들고 세상을 초월하는 사건이다. 참으로 이것은 세상 저편에 있는 나라가 이 세상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정말로 저 멀리 가셨으며, 주님의 성찬 교리는 승천의 실재와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하늘의 영광과 위엄을 보호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이미 주님의 몸과 접목되어 주님의 나라의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누릴 수 없지만, 이 세상 저 편에 있을 유업을 약속 받았으므로, 계속해서 소망하며 기다려야만 한다. 따라서 칼빈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고양된 상태를 강조하고 성령의 사역을 강조함으로써, 성찬에 관한 참된 교리라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종말론적인 강조를 보존하였다.
6. 말씀에 대한 강조. - 그러므로 성찬을 거행하기 전에 설교가 선포되는 것은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말씀은 ‘선언된 것이라기보다는 이해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찬이 그 힘을 획득하는 것은 ‘알아듣기 쉽게 선포되는’ 말씀에 기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소유와 주의 영적인 선물들을 얻는 것은 빵과 포도주의 물질로 말미암은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주께 인도되었고, 주님은 스스로 우리의 것이 되시고, 믿음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이 표징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셨고 제공하시는 것을 모두 이루신다.
7. 다른 의식들을 도입함으로써 성찬의 의미를 흐려지게 해서는 안된다. - 그들이 성직의 능력과 효능이 다 떨어져서 강단에서 차갑고 무관심하게 몇 마디 말을 하였을 때, 의심의 여지없이 우상들이 기독교 성전에 들어왔다. 바울은 참된 설교에서 그리스도가 ‘분명히 보여지며, 말하자면 우리 눈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다’고 증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저주를 담당하기 위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그리고 신실하게 가르침을 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언약을 베푸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 자신을 위하여 행동하신 형식들을 훨씬 간단하게 주셨다는 사실이다. 비록 사람들이 외적인 의식들로 많은 수고를 했다고 할지라도, 하늘의 진리를 무시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권위의 다스림을 받기를 거절하는 것이므로, 그들의 불경건한 태도는 자신들의 완고한 불복종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말 것이다. 지식이 없으면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나 우상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무리 선한 의도라고 할지라도, 말씀이나 하나님의 명령이 없으면 자기들의 생각을 따르는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라고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서, 칼빈은 “이것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말씀이며 신앙적인 것은 어느 것이든지 분별없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불필요한 예배 양식을 도입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타내셨던 참된 상징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주의 교회에서 소외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히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이 내 안에 있는가? 그분의 피에 대해 나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 잔을 들고 어떤 눈물을 흘렸는가? 주님, 죄인중의 죄인, 죄인 중의 괴수가 손들고 주 앞에 갑니다. 용서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