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에 대하여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실학은 무엇인가 ?
2. 실학의 내용 ?
3. 실학을 주장한 학자들 ?
1) 실학 발생의 내재적 요인
2) 실학발생의 외래적 요인
4. 실학이 후세에 미친영향?

본문내용

개혁을 단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당시 지방관(감사·수령)과 향리들이 농민을 수탈하는 것을 먹이를 찾는 굶주린 호랑이와 솔개에 비유하고, 향리를 작은 도둑, 감사를 큰 도둑이라고 비판하면서, ≪목민심서≫에서 지방행정에 관한 개혁안을 상세히 제시하였다.
또한 토지겸병·지주제도의 폐해와 농민이 착취당함으로써 겪는 빈곤을 통탄하고, 〈전론 田論〉에서는 여전제(閭田制) 토지개혁안, ≪경세유표 經世遺表≫에서는 정전제(井田制) 토지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의 여전제 토지개혁안은 농사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하에, 약 30호의 마을 단위로 토지 소유를 공유로 하여 공동경작, 공동수확한 다음 가족별 투하 노동량에 의거하여 분배한다는 방안이었다.
그는 이 여전제 토지개혁에 의하여 지주제도를 철저히 폐지하고 놀고 먹는 양반사족을 농업생산이나 농업기술 연구에 종사하게 하여, 농촌문제를 해결하고 나라의 부를 증대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삼정(전세·환곡·군포세)의 개혁을 추구하여 전세를 대폭적으로 절하하고 잡세를 없앴으며, 환곡제도를 크게 개혁하고 군포법을 호포법(戶布法)으로 개혁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는 상공업도 중시하여 금속화폐 주조와 조세의 금납화를 주장했으며, 수공업 발전과 이용후생을 위해서는 선진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채용하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고, 이를 위한 중앙관서로 이용감(利用監)을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
또한 그는 〈민보의 民堡議〉에서 백성들 스스로 나라를 지키는 민보의 방안도 제시하였다. 즉, 모든 주민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자기 고을에 보루를 쌓고 16∼55세의 남자는 정병(正兵)이 되고 부녀자와 노인, 어린이는 보급을 담당하여, 보장(堡長)의 지휘하에 관군과 협동하는 민간방위 조직을 편성해서, 외적의 침략을 백성들의 힘으로 막아내고 나라와 자기 고을을 방위한다는 방안이었다.
한편, 이규경은 우리 나라의 훈민정음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라고 설명하고 훈민정음 연구와 그 보급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국사(國史)를 새로이 자주적으로 체계화하여 전사(全史)를 편찬, 보급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국토지리에 대한 연구도 매우 강조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조사하여 적극 개발하고, 선진적 제련기술을 도입하여 제련공업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다.
또 당시의 쇄국정책을 비판하고 외국과의 개국 통상을 주장했으며, 서남쪽의 여러 나라들과 개국 통상하여 무역을 진행하고 선진 과학기술을 도입, 채용하는 것은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라고 강조하였다.
최한기는 사민평등을 주장하고 인재등용 문제가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기본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인재의 개념을 그때까지 실학사상가들처럼 정치행정가에 국한시키지 않고 과학기술과 산업 실무의 인재로 확대·발전시켜 그 양성과 선발방법을 제안하였다.
또한 전제군주 한 사람의 통치는 옛날 제도라고 지적하면서, 국민들이 인재를 함께 선거하는 공선(公選)과 국민의 여론인 공론(公論)에 의한 인재 평가, 그리고 온 나라의 국민이 함께 하는 공치(公治)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민주주의 초기적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부유한 양반관료들이 국민들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것을 비판하고 빈곤한 국민들에 대한 동정을 표시하면서 박애와 인도주의를 강조하였다.
또 교육에도 신분에 구애받지 말고 실용성 있는 학문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여, 특히 서민교육·과학기술교육·실업교육·직업교육을 주창하였다.
최한기는 박제가·이규경을 이어 가장 적극적인 개국통상론을 주창하였다. 그는 당시의 쇄국정책을 자기 나라의 앞길을 좁히고 망치는 길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나라의 부강·발전을 위해서는 외국과 개국통상(開國通商)하여 그 나라의 발전된 기계·기술산업·교육 등을 우리의 것과 비교해서 취사선택한 다음 활발한 교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현재 세계 여러 나라들이 내왕하는 세계정세하에서는 마땅히 변(變:개혁)으로써 변을 막을 수 있지 불변(不變)으로써 변을 막을 수는 없다고 지적하였다.
또 개국한 뒤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발달된 외국의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서양의 화력과 수력 이용기술, 증기기관, 방직기계 등을 적극 도입할 것과, 우리에게 유익한 서양 서적과 법제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세계 인류가 서로 ‘평등’하게 ‘인도(人道)’를 존중하여 ‘평화’를 유지하고 과학기술을 상호 지원하여 공동의 번영을 이룩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세계공통어도 만들고 동양의 인의(仁義)에 관한 도덕과 서양의 과학기술 학문을 결합시켜 세계적 종교로 만들어서 대동세계(大同世界)를 이룩하자는 구상도 제시하였다.
이 밖에도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와 ≪종저보 種藷譜≫를 저술하여 농업과 임업과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구와 방안을 내놓았다.
김정호는 30년간 전국 각지를 답사하고 연구한 성과인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를 1861년에 완성하였으며, ≪대동지지 大東地志≫(1864)를 출판하여 우리 나라의 산업지리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실학의 사회사상은 19세기 초엽에 들어와 근대 지향성을 명확히 보이며, 이규경과 최한기에 이르면서 개국통상을 실현하고 시민사회를 성립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실학이 후세에 미친영향?
조선 후기의 실학에 대한 이해증진을 위해 실학의 성격을 중심으로 실학 사상의 발생 요인, 실 학자들의 관심분야와 실학의 성격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고 선학의 견해들을 종합한 입장을 전개하였다.
결론적으로 실학은 조선 후기에 당면한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당시 선구적 지식인들에 의해 전개된 유교적 이상 사회로의 복귀를 바라는 염원에서 이루어진 학문으로써 역할 유교적 이상정치인 민본정치와 왕도정치 로의 시대정신의 정화 차원이었지, 조선 후기 신분제 붕괴설에 입각한 신분제 철폐론 등을 주장한 실학자는 없었다고 본다.실학은 후대의 개화 사상과 애국계몽운동의 사상적 연원을 이루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여러가지 주장들은 한말 개화파 사상가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실학의 근대적 요소가 더욱 드러나 보이게 한 것이었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4.11.27
  • 저작시기2004.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559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