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의 모든 면에 대한 조사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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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개토대왕의 모든 면에 대한 조사 레포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글을 시작하며

2. 광개토왕의 즉위 이전의 상황

3. 광개토왕의 업적

4. 광개토왕의 통치

5. 삼국사기의 광개토왕편

6. 글을 마치며

- 참고문헌

본문내용

백명을 사로잡고, 또 본국에서 잡혀갔던 백성 1만 명을 불러내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백제의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이고 바닷물이 둘러 있어, 왕이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20일 동안 공격해서야 함락시켰다.
2년(392)
가을 9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노하므로 장수에게 명해 막게 하였다.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3년
가을 7월에 백제가 쳐들어오자 왕이 정예 기병 5천명을 거느리고 맞받아 쳐부수었으며, 남은 적들은 밤에 도망하였다. 8월에 나라 남쪽에 일곱 성을 쌓아 백제의 침구에 대비하였다.
4년
가을 8월에 왕이 백제와 더불어 패수 가에서 싸워 크게 쳐부수고, 8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9년
봄 정월에 왕이 사신을 연에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연 왕 모용성 모용성은 후연의 제3대 왕으로, 제2대 왕인 모용보의 서장자이다. 398년부터 401년까지 재위하였다. 전연이 부견에게 멸망당한 뒤 후연을 세운 모용수 아래로 가서 장락공에 봉해졌으며, 모용보가 피살되자 그 뒤를 이어 국력 부흥을 도모하여 고구려와 고막해를 쳐서 승리하기도 했으나, 역시 금군의 반란이 일어나 피살당하였다. 「진서」124 재기 24 모용성.
이 우리 왕의 예의가 오만하다 하여 스스로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습격해 왔다. 표기대장군 모용희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과 남소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7백여 리의 땅을 넓혀서 백성 5천여 호를 옮겨놓고 돌아갔다.
11년
왕이 군사를 보내 숙군성을 치자, 연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13년
겨울 11월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연을 침공하였다.
14년
봄 정월에 연 왕 모용희 모용희(385~407)는 후연의 제4대 왕으로 모용수의 작은 아들이니 3대 왕 모용성의 숙부이다. 401년부터 407년까지 재위하였다. 모용성이 피살된 후 즉위했는데, 정치와 형벌이 혹독하고 토목공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백성을 혹사했으므로, 결국 풍발이 옹립한 모용운에게 살해됨으로써 후연은 멸망하고 말았다. 「진서」124 재기 24 모용희.
가 요동에 쳐들어왔다. 성이 막 함락되려 하자 모용희가 장병들에게 말하기를 “먼저 성에 오르지 말라. 성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내가 황후와 함께 가마를 탄 채로 들어가리라”하였다. 이 때문에 성 안에서 엄중히 방비할 수 있게 되어 끝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15년
가을 7월에 누리가 생기고 가뭄이 들었다.
겨울 12월에 연 왕 모용희가 거란을 습격했는데, 경북까지 와서는 거란의 군사가 많은 것을 두려워해 돌아가고자 하였다. 마침내 군수품들을 버리고 군사를 가볍게 해서 우리를 습격해 왔다. 연의 군사들은 3천여리를 행군하여 사람과 말이 피로하고, 얼어서 죽은 이들이 길에 이어지더니, 우리의 목지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16년
봄 2월에 궁궐을 증축하고 수리하였다.
17년
봄 3월에 사신을 북연에 보내 종족의 예를 차렸더니, 북연왕 모용운이 시어사 이발을 보내 답례하였다. 모용운의 할아버지 고화는 고구려 왕실에서 갈려나온 혈족인데, 스스로 이르기를 고양씨의 후예이므로 고양씨는 황제의 둘째 아들 창의의 아들로, 황제를 이어 즉위한 전욱을 말한다. 그는 농작물을 심고 가축을 기르며 황무지를 일구었다 하며, 계절과 기상의 변화를 고려해 일을 처리하였고, 귀신을 섬기는 예를 제정했다 한다. 「사기」오제본기
고씨라고 했다 한다. 처음에 모용보가 태자가 되었을 때 고운이 무예로 동궁을 모셨는데, 모용보가 그를 아들로 삼고 모용씨라는 성을 내려주었다. 모용운에 관한 내용은 「진서」124 재기 모용운조에 의거한 것이다. 그는 후연의 제2대 왕 모용보의 양자가 된 고구려인으로서, 제4대 왕 모용희가 살해된 뒤 풍발에 추대되어 천왕의 지위에 오르자, 성을 고씨로 회복하고 국호를 대연이라고 하였다. 407년부터 409년까지 재위하였다. 그러나 실권은 풍발에게 있었으며, 결국 심복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이어 풍발이 즉위하여 용성에 도읍하니, 곧 북연 태조 문성제이다.
18년
여름 4월에 왕자 거련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에 나라 동쪽에 독산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겼다.
8월에 왕이 남쪽 지방을 돌아보았다.
22년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광개토왕이라 하였다. 길림성 집안현의 일명 ‘태왕릉’을 광개토왕의 능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글을 마치며...
- 역사적으로 위대한 통치가로서 영웅적인 정치를 해서 혹은 길이 남을 업적을 통해 일세를 풍미한 영웅은 많다. 그러나 그 업적이 후세에까지 민족을 부국강병으로 존속하게 했던 사실은 동서의 고금을 막론하고 드물다. 서양의 시저, 나폴레옹, 동방의 징기스칸도 전쟁을 통해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들이었다. 광개토대왕도 이들과 더불어 세계의 빛나는 영웅들 중에 하나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업적은 대부분 가리워졌고, 삼국사기에만 간략한 기사가 있다. 광개토 대왕의 찬란한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아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 대왕왕릉비가 19세기 후반에야 발굴되어 중국 학자와 일본 학자들이 탁본을 만들기 위하여 훼손한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더욱이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 비문이 조작되면서 해석이 왜곡되어 임나일본설의 자료로 활용된다는 정보를 접했을 때에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였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우리나라가 신라에 의하여 통일될 것이 아니라 고구려에 의하여 통일이 이루어졌으면 더 바람직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이것은 고구려가 외세의 힘을 끌어들이기는커녕 동북아를 호령하고 중국까지 넘보는 강력한 제국이었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또 위와 같은 의견에 일부 공감을 하기도 한다. 강대한 고구려의 중심에 광개토대왕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광개토대왕은 정복왕으로뿐만아니라 어진 정치를 편 이상적인 성군으로 기억될 것이다.
※ 참고 문헌
삼국왕조 천년. 최향숙. 교학사. 2001
삼국왕조실록. 임병주. 들녘. 1998
삼국사기. 김부식. 이강래 옮김. 한길사. 1998
광개토대왕의 전술. 강무학. 세진사. 1990
광개토대왕과 고구려 남진정책. 고구려 연구회. 학연문화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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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07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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