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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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머리말

Ⅱ. 지방정치와 중앙정부

Ⅲ. 국민정부와 농민의 관계

Ⅳ. 항일 전쟁과 국민정부군

Ⅴ.맺음말

본문내용

나가 있었다. 돈으로 매수해 징병되지 않는 자도 있었고 징병원칙 세 가지가 완전히 무시되고 각 지역의 유력자들 회의를 통해 누구를 보내고 누구를 보내지 않는다는 논의가 사전에 진행이 되었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가면 더더욱 병력 수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어 심지어 식솔이 딸린 가장이 밭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강제로 연행해 신병에 편입시키는가 하면 강제 징병단을 조직해 조금만 여유를 갖고 있는 젊은 남성들을 납치해 군에 입대시키는 일도 빈번했다. 기본훈련도 제대로 시키지 아니하고 전선에 배치하는 일이 부지기수라 배속되자마자 사상자가 되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모집해 관리되는 신병들은 설상가상 정부의 관리 소홀과 군 내부의 부패로 굶주리고 쇠약해졌으며 질병에 시달렸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복건성에서 귀주성으로 향하던 한 행군병력 1000명중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한 자는 100명 미만이었고 광동에서 운남까지의 500마일 행군 중 700명중 17명만 살아 남은 예도 있다. 1943년 징병된 167만 중 거의 반수인 44%가 배치부대로 가는 행군도중 사망하거나 도망쳤던 것이다.
일본군과 8년 간의 전쟁동안 국민정부군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붕괴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그럭저럭 전과가 있었으나 1942년 이후부터 전혀 군사작전을 수행하기가 불가한 상태에 이르렀다. 물론 개중에 미군 측으로부터 훈련을 받은 몇몇 사단들의 경우는 비교적 양호한 급식과 장비를 지급 받아 효과적인 군사활동을 벌였고 이들은 전쟁 후 공산군과의 내전에 투입되게 된다.
전쟁직후 그래도 국부군의 상태는 비록 지쳐있었지만 공산세력보다는 양호한 상태에 있었으며 장개석은 6개월 안에 공비세력을 토벌하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하였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전세는 1947년 이후 공산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으며 그로부터 중국 공산화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훗날 공산화의 이유에 대하여 국민당 지지파들은 미국 측의 지원부실을 이유로 들고 나오지만 주류적 요인은 국민당 자체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공산당이 훨씬 더 능률적인 군 운용과 지도를 펼쳤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난다.
다음은 민간인들이 공산군에 협조적이었던 사실이다. 노인과 젊은이를 망보는데 이용하였고 주민 전부가 정보망 노릇을 하였다. 식량이 떨어지면 민간인들과 먹을 수가 있었으며 부상자를 전장에 내버리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민간인과의 협조관계는 대조적으로 이런 것이 없던 국민당에게는 크나큰 손실이었다. 이는 진정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미 민심마저도 공산당 측으로 이반되어 가는 당시 중국의 실상이었다.
Ⅴ.맺음말
국민당정부의 패배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민심의 이반을 초래한 국민당정부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대안 없는 정책 및 인민대중의 힘을 의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정치적 패배이다. 특히 항일전쟁 종결이후 친일파의 청산에 실패함으로서 민족적 정통성 경쟁에서 공산당에게 패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평화와 민주화에 대한 갈망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사회개혁을 추진할 능력이나 의사도 없었으며 전비마련을 위한 무절제한 화폐발행 등으로 초래된 천문학적인 인플레는 국민정부의 붕괴를 촉진하게 되었다.
한편 공산당은 제1차 국공합작시기와 강서소비에트 시기및 연안시기를 거치면서 각시기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종합하여 이른바 '신민주주의 혁명'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중국공산당은 중일전쟁과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던 중국사회의 내재적 위기상황에서 농민들 대다수의 이익과 안전을 보장하는 사회경제적 개혁을 나름대로 추진함으로서
농민민족주의 성향을 띈 대중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민정부는 튼튼하고 건전한 정치적 구조를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 국민당이 정권을 잡을 무렵 중국은 지방군벌들에 의해 분열과정을 겪고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 국민당은 그 분열과정을 역전시켰다는 의미가 크다. 그러나 훗날 국민당정권의 구조가 약화된 이유는 대중의 욕구를 민감히 감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국민당내 좌파가 대중의 욕구와 필요로 하는것에 대해 잘 알고 이를 정책에 반영시키려 노력하였으나 이들은 국민당과의 이념이 다른 관계로 많은 핍박을 받았다.
손문을 이어 장개석이 정권을 잡은 후부터 군인들은 국민당 내에서 종전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 장개석의 정치관을 보면 매우 전통적임을 알 수 있다. 병사가 장교에 복종하듯 무조건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도 민주주의에 대해 자주 말하였고 대중적 지지를 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일본과의 전쟁은 국민당정권 유지에 있어서 일대 폭풍과도 같은 시련이었다. 이로 인하여 국민당군의 결합력과 효율성이 손실되는 피해를 가져왔다. 또 일본군의 공세에 서부중국으로 후퇴한 것도 약화 요인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동부와 확연히 다른 서부중국에 정치, 군사, 경제적인 요소를 동부지역과 같이 적응시키려고 하였다. 공산당은 그렇지 않았으나 국민정부는 오지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다. 특별한 수입원을 개발하지 못한 정부는 지나치게 적자재정에 의존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인플레가 생겨나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군과 일반민들의 무능과 굶주림 등의 요인은 인플레에 전적으로 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에 전쟁은 공산군을 성장하게 하고 강하게 만들었다. 이점도 국민당에게 타격이었다. 항일전 10년동안 국부군은 공산군을 몰아세워 상당한 손실을 가했으나 1937년 이후부터 안심한 국부군은 이들의 추격을 늦추기 시작하였다. 이틈에 공산군은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명목상의 유격활동으로 광범위한 조직기술을 발전시켰다. 또 항일전 직후 소련이 만주지역을 재빨리 장악하고 중국 내 공산당을 종용했던 것도 국민정부 붕괴의 직접원인중 하나이다.
결론적으로 국민당정권의 붕괴는 사회적 기반을 상실한 군사 독재적 지향이라는 구조적 취약성과 일본과의 전쟁이 가져온 것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장개석은 공산당 군에 비해, 몇 배나 많은 병력, 월등한 재정기반, 거기에 미국의 막대한 군사지원까지 받았음에도 결국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모택동에게 패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로이드 E 이스트만 저, 민두기 역,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지식 산업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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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14
  • 저작시기2004.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8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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