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식민지 교육과 민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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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본론 . 식민지 교육과 민족 교육
1. 한일 합방 이전의 교육적 배경 - 동도서기론적 근대교육
2. 일제하의 식민지 교육
(1) 통감부에 의한 교육
(2) 총독부에 의한 교육
3. 식민지 교육에 대한 저항과 민족 교육
(1) 저항적 민족주의의 형성과 민족 교육
(2)무차별 동화정책과 민족교육의 전개 양상
Ⅲ. 나오며 - 식민지화 교육의 폐해와 영향

본문내용

하였다.
1)민립대학 설립운동
3·1운동 이후 우리 국민들의 각성이 고조되고 민족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아지게 되었다. 박은식, 양기탁, 조만식, 남궁억등은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모금한 돈을 가지고 '민립대학기성회'를 발족하고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진행시켰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교육협회 임원들에게 민립대학 설립을 포기하거나 설립시 일본 사립대학의 분교로써 발족할 것을 종용하였으며 일선공학제 등을 강권하였다. 또한 일제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여 방해공작을 펼쳤다. 게다가 관동대지진과 남부지방의 가뭄까지 겹쳐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민족자체의 고등교육기관을 통해 인재 양성을 꾀했다는 점과 이를 통햐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당시 국민 대다수가 초등교육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민립대학의 설립이 대다수 민중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도 가지고 있다.
2)농촌계몽으로써의 민족교육
야학은 1925년 이후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애국적 지식인들과 청년들에 의해서 1926년~ 1934년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을 위한 대대적인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계몽운동은 언론기관의 자극과 지원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확산하게 되었다.
1926년 조선일보사는 증등학교 이상의 학생들이 문맹퇴치에 힘쓰도록 하는 문자 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반면에 동아일보사는 1928년부터 문맹퇴치운동을 벌이려다가 일제의 제지로 좌절했지만 1931년부터 브나로드 운동이라는 학생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밖에도 수원농림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상록수운동'등 청년학생들에 의해 많은 계몽활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문맹퇴치운동은 '조선어학회'의 참여와 지원으로 발전해나갔다.
조선어학회는 한글연구를 계속하여 『한글』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한글의 가치와 인식을 고양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확정되었다. 또한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여 만주나 간도 등에서 한글강습회를 주도하기도 하며 체계적인 문자보급이 가능하도록 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러한 계몽운동은 193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이러한 활동도 금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청년학생, 언론기관,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집단이 결집하여 민중을 대상으로 전개한 거국적 교육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식민지 시대의 민족교육으로써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Ⅲ. 나오며 - 식민지화 교육의 폐해와 영향
우리가 살펴본 일제 시대의 식민지 교육은 교육이 일본의 식민정책과 팽창주의를 실현키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다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전략했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식민지화, 일제의 대륙침략 욕심과 전쟁의 확대로 인한 전쟁 동원의 필요성에 의하여 조선인에 대한 교육을 이용한 것이다. 또한, 식민정책의 실현을 위해 교육의 통제가 요구되어 교육행정조직이 관료화되었다는 점을 문제점으로 들 수 있으며, 대동아 건설을 위하여 한국을 일본의 병참기지로 만들면서 학교를 병영화했다는 점도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서구의 근대교육이 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지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적 인력을 생산해 내고 또한 자유주의자들이 평등화의 요구를 수렴시키고 있는데 반해, 우리 나라의 근대교육은 자국의 사회발전을 위해 창안된 근대교육이 아니라 식민지하에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이식된 것이었으며 결국 제국주의 이념에 부응하는 근대화된 식민지 노예교육을 성격을 가실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식민지 노예교육은 그 자체가 반민족적인 가치를 내재하고 있었으므로 제도상으로도 비민주적일 수밖에 없고 또한 제국주의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식민지 노동력을 배양해 낼 수밖에 없었다. 한국 근대교육제도화의 태동기에 나타난 이러한 특성들은 일제 식민지하 전 기간을 거쳐 더욱 심화되었고 해방 후 한국 교육제도를 구제하는 일면을 갖게 되었다.
♣참고문헌♣
·강만길 외, 한국사 14권 「식민지시기의 사회경제 2」, 한길사, 1994
·박경식,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 청아 출판사, 1986
·김상웅 외, 일제침략사 65장면, 가람기획, 1996
·인터넷 자료 : 서울 육백년사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6-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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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15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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