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와 복수는 나의 것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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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올드보이와 복수는 나의 것 비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축을 설정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무산자 대 무산자(혹은 무산자 대 유산자를 꿈꾸는 무산자)의 대립 구도를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같은 접근이 자본주의 착취 구조의 비인간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기묘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 동진과 류는 서로에게 이유와 동정, 연민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가차없이 칼을 들이대며 처절한 복수극을 벌인다. 복수의 대상은 어쩌면 서로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주고 있는 이 세상의 구조에 있는 것임에도 그들은 그걸 깨달을 틈이 없다. 그들 뒤에 음흉한 웃음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착하게 살아 온 내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냐며 통곡하면서 이유없는 복수의 대상을 찾아 헤매고 있을 뿐이다. 복수를 꿈꾸는 두 사람의 시선과 표정에서 잔인함보다 비참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때문이다. 류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설정 역시 두 주인공이 원천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단순히 류가 동진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동진 역시 류의 사정을 알아챌 수 없기 때문이다. 동진의 집앞에서 칼을 품고 기다리는 류의 모습과 류의 방에서 고문 도구를 갖춘 채 기다리는 동진의 모습이 교차 편집되는 장면은 두 사람이 공감각적으로 철저하게 분리돼 있음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류의 연인 영미의 존재다. 무정부주의자임을 자처하며 유산계급에 대한 철저한 보복을 주장하는 영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흔히 머릿속에서 그려 내는 혁명가의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어설프고 장난스러우며 그래서 다소 한심스럽게 보인다. 동진에게 죽기 전 그녀가 얘기하는 무산자동맹 그룹의 복수는 그래서 한낱 허풍처럼 들린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그녀의 얘기가 사실임이 드러 난다. 박찬욱 감독은 아마도 이런 영미의 존재를 통해 자칭 이 시대의 개혁주의자들 대다수가 얼마나 주류화돼 있고 또 실제로 얼마나 제도권 귀족으로 변질돼 있는 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박찬욱 감독은 이번 네번째 작품을 통해 부조리한 지금의 세상 한가운데에 가슴 서늘한 단검을 내리 꽂았다(실제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중 한명의 가슴에 단검이 내리 꽂힌다). <공동경비구역 JSA>로 상업영화권에서 발판을 다지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던 박찬욱 감독은 이번 작업을 통해 본래의 작가주의적 성정으로 급격히 유턴하며 그것 역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과시했다. 박찬욱 감독은 이제 대중상업영화와 작가주의 영화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대가적 기질의 감독임이 확인됐으며 자신 스스로에게 영화인생 10여년의 난관 속에서도 세상에 대한 진실을 결코 외면하지 않아 왔음을 떳떳하게 증명했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은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과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 등과 함께 2002년 상반기 한국영화계가 발굴한 최대의 원석이자 한동안 그 빛이 변치 않을 귀중한 보석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착한 사람이 왜 아파야 하죠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나서, 두번이나 악몽을 꾸었습니다. 얼핏 몇몇 끔찍한 장면들과 등장 인물 모두가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리는 내용 때문이었던 듯 합니다.
관객이 잠시 숨을 몰아쉴만한 작은 쥐구멍 하나 열어두지 않고 끝까지 몰아붙이는 이 영화는 폐소공포증까지 느끼게 합니다. 복수는 나의 것은 분명 고수(高手)가 만든 뛰어난 완성도의 작품이었고 배우들 연기도 탁월했지만, 그래서, 두번 보고싶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 악몽은 어쩌면 답을 얻지 못한 채 벽에 처참히 부딪치고 마는 이 영화의 물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왜 선량하게 살려는 사람에게 불행이 닥치나하는 것이겠지요. 이 영화는 전 착한 사람입니다. 성실한 근로자죠란 유괴범의 방송 엽서 사연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유괴된 아이 아버지는 아이가 죽고난 뒤 나름대로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내게...라고 탄식합니다. 실제 그 유괴범은 누나 신장병을 고치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유괴했지요. 아이 아버지는 오랜 세월 피땀 흘려 작은 회사를 갖게 된 사람이고요. 그런데 그 착한 자들이 얽혀 벌어지는 일들은 비극일 뿐이었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 주제는 사실 지극히 종교적입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물음은 모든 종교가 해결하려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니까요. 조로증(早老症)에 걸린 아들을 14년간 간호하다 떠나보냈던 해롤드 커쉬너 같은 신학자는 아예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라는 책까지 내며 그 질문에 깊이 파고들었지요.
하지만 이 영화는 종교적 해답을 배제하면서 물음만을 도드라지게 살려내 깊은 늪 속에서 처연히 울리게 합니다. 이 영화는 결국 복수가 나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 것이냐고 재차 물을 때 떠오를 수 밖에 없는 게 바로 이 영화의 지배적 정서입니다. 그건 생(生)에 대한 무력감,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탄식입니다. 그게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을 짓눌러대는 것들의 정체인 셈입니다.
깊은 복수는 깊은 침묵의 딸이다는 비토리오 알피에리 말을 떠올릴 때, 처참한 복수로 이어진 영화 속 아이 아버지의 침묵은 삶의 부조리와 불가해성을 목도한 후 표출되는 분노 섞인 수긍과 체념으로서의 침묵이지요. 전경린 소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의 프롤로그엔 인간은 행복이나 불행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오히려 행복이나 불행이 인간을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말이 나오던가요.
손튼 와일더의 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엔 줄다리가 끊어져 다섯명이 죽는 사고를 목격한 사제가 나옵니다. 그 의미를 놓고 고민하던 그는 죽은 자들의 삶을 살펴보다 그들이 모두 최근 큰 문제를 해결해 이제 막 삶의 새 국면에 접어들려던 순간이었음을 알아냅니다. (그 사제 해답에 동의하긴 쉽지 않습니다만) 이 소설 결론을 아이 아버지가 복수를 다 마친 순간 죽음을 당하는 이 영화 결말에 붙여보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순간은 생을 마쳐야 하는 순간까지 오지 않는다고, 삶에 내재한 궁극적 질문은 결국 무덤까지 가져가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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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4.12.17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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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79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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