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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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 론
고조선을 재조명하는 취지
본 론
단군신화의 형성
고조선의 형성과 붕괴
고조선의 강역 문제
고조선의 사회
결 론
고조선 연구가 나가야 할 방향

본문내용

은 부분은 국왕이 직접 통치를 하고 국왕의 통치권 밖의 후국들은 왕족들이나 왕의 측근들이 후왕으로 임명되어 자기 백성들을 통치하였다.
고조선에서의 제후왕들은 국왕의 신하로서 왕에게 종속되어 있었으며 국왕으로부터 여러 가지 경제적 및 군사적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만이 초기에 준왕으로부터 서부국경을 지킬 임무를 받은 것은 후왕들이 국왕 앞에서 군사적 의무를 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의 하나이다. 사회과학연구원 역사연구소, ■조선 고대사■, 한마당, 1989, p 95∼98
3. 고조선의 사회와 계급구성
계급의 발생은 농업의 발전과 관련이 깊다.
농업의 발전은 원시공동체 안에서 잉여생산물의 증대를 가져왔는데 그 잉여생산물은 씨족성원들에게 불평등하게 분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부유한 특권층이 나타가게 되고 노예도 생기게 되었다.
고조선이 계급 국가로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서 이른 바 "범금8조" 가 있는데 이는 당시의 사회가 계급분화가 완전히 이루어진 사회였고 나아가 노예제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주요 근거로 제시되어지곤 한다.
8조가운데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단지 3개조항만으로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①.사람을 죽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②.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써 보상하여야 한다.
③.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남자의 경우에는 도둑맞은 자의 노예로, 여자인 경우에는 여자노예로 만든다. 만일 도둑질한 자가 죄를 벗으려면 50만 전의 돈을 내야 한다.
이는 부를 가진자를 옹호하는 내용과 노예에 대한 규정 등으로 사유재산제가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3째 조항은 노예소유제에 대한 옹호를 말해주며 반면에 공동체적 농민들의 노예화를 합법시키는 것이다. 이것에 의하면 노예의 공급이 전쟁 포로뿐만 아니라 공동체 농민들의 몰락에 의해서도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체무노예의 존재도 충분히 상정이 가능하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계급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설명해주며 법률이 노예소유자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중요한 독제수단이었으며 사유 재산의 침해에 대하여 가혹하게 징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과학연구원 역사연구소, ■조선 고대사■, 한마당, 1989, p 21, 61, 101
고조선의 사회구조는 읍, 국읍, 아사달, 신시 등의 명칭을 가진 마을들이 상하관계로 중첩되어 있었다. 일반 읍에는 피지배 신분의 씨족들이 거주하고 국읍에는 거수와 그의 씨족이 거주했었다 그리고 아사달에는 단군과 그의 씨족이거주하고 신시에는 종교의 지도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조선의 신분계층은 노비와 일반 읍에 거주하며 귀족에게 종속되어 농사를 짓는 하호 그리고 귀족에게 종속되지 않는 자경농민의 민과 부유한 평민인 호민 그리고 지배귀족으로 나눌 수 있다. 윤내현, ■고조선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민음사, 1995, p 166∼170
결 론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고조선은 우리가 알고 배워왔던 것 보다 더욱더 체계적이고 고도화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과는 차별화되는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왔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의 문화에 구애 받지 않고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단일성과 창조성을 자랑할 만한 것이다.
본문에서의 조사 결과와 같이 아직은 우리의 근간인 고조선의 연구가 미비하고 정확성이 많이 떨어지지만 고조선은 우리 민족의 단합과 우기 타계를 위한 매개체로 항상 존재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에 관한 많은 주장을 내세웠고 심지어는 고조선의 문화만이 우리나라의 고유 문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마저 있었으며 아직도 그들 즉 단군을 믿는 종교까지 존속해오고 있다.(대종교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지만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비록 지금은 중국의 영토로 되어있는 만주와 늘 하나였던 한반도마저 둘로 나누어져 있지만 만주와 한반도는 우리의 근간이었던 곳이었고, 민족들의 얼과 혼이 숨쉬고 있는 곳이다. 그 넓은 대륙을 호령했던 기상은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라는 반만년, 그 중 우리가 남의 눈치를 받고 머리를 조아리던 시기는 불과 1000년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가지고 주변국들과 대등한 힘을 겨룬 시기가 훨씬 더 긴 것이다. 그 정신은 바로 고조선의 진취적인 정신이 기본이 된 것이었다.
고조선은 우리 민족이 처음 세운 국가이다. 그 만큼 그에 따른 자긍심과 긍지도 남달랐던 것이었고, 그 나라를 모국으로 생각해왔다.
그랬던 고조선이 우리민족의 역사적 비극과 음모속에서 진실된 역사가 감추어져 왔다. 요즘들어 새로이 많은 연구가 되고 있지만 아직 밝혀낸 것 보다, 배일에 감추어진 부분이 더 많이 남아 있다. 우리 민족의 민족사회, 민족문화의 원형인 고조선 연구야 말로 한민족의 역사회복의 길이다. 즉, 민족정신의 회복인 것이다. 속히 많은 연구성과로 우리의 민족성으로 대변되는 고조선이 제자리에 바로섰으면 하는 것으로 이 글의 끝맺음이자 바램이다.
<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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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기백, ■한국사 시민강좌■, 일조각,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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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영수, ■한국사 시민강좌■, 일조각, 1988, p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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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윤내현, 1986년 11월 5일자 조선일보에서 발췌
14. 사회과학연구원 연사연구소 ■조선 고대사■, 한마당, 1989
15. 윤내현, ■고조선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민음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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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19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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