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19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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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1920년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1.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논의
2. 우리의 정체성은 어떠한가
3. 일제 강점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Ⅱ. 본론
0 . 1920년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 1920년대 일제강점기 통치의 특징
2. 1920년대 일제 강점기 한국사회의 농업·산업
3. 1920년대의 새로운 움직임과 대중운동
4. 사회주의 사상의 도입과 사회주의 운동의 전개
5. 민족협동전선운동과 유일당운동
6. 항일무장투쟁과 독립군 통합운동

Ⅲ. 결론

본문내용

초반에 가지던 민족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더욱 절실했던 것이 아닐까? 이러한 대립 구도는 이후 민족협동전선운동과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발전한다.
5. 민족협동전선운동과 유일당운동
앞서 살펴보았던,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간의 대립은 민족독립운동에 있어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한 상해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했던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돌아간 뒤, 임시정부마저 침체기에 들어가면서 전체 민족독립운동전선이 분산되어갔다.
따라서 192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 시기에는 새로운 방법론이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이당치국'(以黨治國)이라는 원리에 입각한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1920년대 중엽부터 전개된 이 운동은 분립된 좌우익전선을 통일하여 대일본 전선을 강화해야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은 국내와 국외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그 선구적 조직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민족당주비회'였다. 또한 중국에서도 '북경촉성회' 등이 생기고, 만주에서도 정의부·참의부·신민부를 중심으로도 통합운동이 이루어진다. 1920년대 후반의 이러한 노력으로 혁신의회와 국민부가 성립하고, 이는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으로 개편된다. 그러나 이후에 조직의 방법론상의 문제로 대립하게 되어 합의되지 못했고, 결국 유일당운동은 실패하고 만다.
해외 민족유일당운동은 마지막 단계에서 실패하고 말았으나 그 일환으로 국내에서 전개된 신간회는 민족독립운동의 방향성을 대표하는 등의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사회주의세력과 비타협적민족주의 세력이 주도한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하기도 하고, '12월 테제'에 맞추어 식민통치에 대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그러나 이 후 자치운동과 협력하면서 합법운동을 지향했고, 새회줘의 세력이 우세했던 각 지회에서 '해소론'이 대두한다. 게다가 프로핀테른에서 신간회를 민족개량주의 단체로 규정하면서 일부에서는 신간회를 아무런 투쟁능력이 없는 소부르주아적 단체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초기에 관망적이던 일본이 이 운동의 발전을 교묘하게 탄압하면서 1931년에 신간회는 해소된다.
물론 신간회가 민족개량주의로 흐르는 과오를 범하기는 했지만, 해소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합법공간을 무너뜨림으로써, 오히려 개량주의의 본모습을 폭로하고 그 과정으로 운동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또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 구심점을 잃고 분산·고립되는 모습은 신간회의 해소가 그 의의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6. 항일무장투쟁과 독립군 통합운동
국내에서 민족개량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벌어지고 있을 때, 만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국내 진공을 목적으로 했던 이들은 신민회나 임시정부의 도움으로 성립된 곳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 대한독립군과 북로군정서는 1920년대의 독립전쟁사에서 대표적인 독립군 부대였다.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은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동북만주 최대 부대였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청산리에서 일본군 12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일본군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지방에서 학살을 저지르자, 독립군은 소·만 국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다수의 독립군이 모여서 대한독립단을 결성하고 소련지역으로 들어갔으나,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분열되고 말았다. 이들은 1923년에 대한통군부를 조직하였으나, 다시 분열되어 참의부·정의부·신민부로 나뉘어졌다. 이들은 교포사회를 바탕으로 한 일종의 자치정부였고, 정부를 운영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1920대 중반부터 이들 단체를 중심으로 앞에서 이야기 했던 분산된 독립운동 단체를 통일하려는 민족유일당운동이 벌어졌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 그 뒤, 이들은 각자의 활동으로 무장투쟁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토벌과 지도부의 파벌싸움으로 점차 쇠퇴해져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이 교포사회와의 현실적 결합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 만주 무장투쟁의 실패원인이었다.
이러한 독립군의 활동 이외에도,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일본 고위관료나 친일파에 대한 암살을 수행하였는데, 그 외에도 1920년 조선총독부 파괴를 기도하기도 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2년 신채호를 만나서 이론체계를 갖춘 이들은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개량운동을 혁파하고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제기하여 의열단에 용기를 북돋았다. 그러나 1925년에 단순한 테러행위의 한계를 깨달은 이들은 조직적 군사훈련을 중국에서 실시하였는데, 중국의 장개석이 국공합작을 파기하면서 의열단을 탄압하였다. 그리하여 의열단 조직도 와해되었는데, 이들은 국내 노동운동에 종사하거나,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등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Ⅲ. 결론
지금까지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시기의 한국사회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일본의 수탈정책과 독점자본의 진출로 당시 한국사회는 피폐해지기 시작하였고, 이는 노동운동이나 소작쟁의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운동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지주·자본가를 중심으로 한 민족개량운동과 1920년대에 유행했던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이 있었으며, 이들 사이의 통합운동으로 신간회가 결성되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해소되기에 이른다. 국내의 이런 움직임과 함께 만주지역에서는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는데, 청산리전투나 봉오동전투와 같은 대승이 있었음에도, 자유시참변과 같은 사건으로 무장투쟁은 미약해지기 시작하였고 이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는 의열단을 중심으로 한 조직적 테러가 있었으나, 그 한계로 인해서 해외로 나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문화통치 이후에, 일본의 표면적인 융통성의 확대로 다양한 사회운동이 허용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노선상의 대립, 외부적으로는 일본의 더욱 교묘해진 탄압으로 인해 많은 운동들이 실패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1930년대로 이어져서 독립운동의 면모를 이루게 된다. 또한 광복 후에도 이러한 모습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이루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참고문헌: 박지향 '제국주의' 서울대학교 출판부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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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21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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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79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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