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 일본 성립이전 왜(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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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의 역사 일본 성립이전 왜(倭)나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일본의 건국신화】
【왜에 대한 개략적 개요】
【일본인의 기원】
【일본인의 기원】
【그럼 일본인은 한국인의 후예인가?】
【사서(史書)에 나온 왜(倭)와 한반도(韓半島)의 관계】
【마무리】

본문내용

잔존 무리)이 들어와 명활성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니 왕은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독산(獨山)의 남쪽에서 목을 받아 또 싸워 무너뜨리고 3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四年夏四月倭兵來攻明活城不克而歸王率騎兵要之獨山之南再戰破之殺獲三百餘級」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6년(A.D 407년) 봄 3월 왜인(倭人:註 구태백제 군사와 멸망한 응신조 왜 잔존 무리)이 동쪽 변방(邊方)을 침범하였다. 여름 6월 또 남쪽 변방을 침범하여 1백인을 잡아갔다. 六年春三月倭人侵東邊夏六月又侵南邊奪掠一百人」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14년(A.D 415년) 가을 8월 왜인(註 구태백제 군사)과 풍도(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十四年秋八月與倭人戰於風島 克之」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 2년(A.D 418년) 가을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이 왜국(倭國:註 대마도 임나연정)에서 도망해 왔다. 二年 春正月王弟卜好自高句麗與堤上奈麻還來秋 王弟未斯欣自倭國逃還」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 15년(A.D 431년) 여름 4월 왜병(註 대마도 임나연정 군사)이 동쪽 변방을 침범하여 명활성(明活城)을 에워쌌으나 소득 없이 돌아갔다. 十五年夏四月倭兵來侵東邊圍明活城無功而退」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 28년(A.D 444년) 여름 4월 왜병(註 대마도 임나연정 군사)이 금성(金城)을 포위한지 10일만에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니 왕이 군사를 내어 추격하려 하자 좌우 신하들이 아뢰기를 "병가(兵家)의 말에 궁한 도둑은 추격하지 말라 하였으니 그냥 두시오" 하였다. 왕은 듣지 않고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독산(獨山)의 동으로 쫓아가 부딪쳐 싸우다가 적에게 패하여 장병의 희생자가 반을 넘으니 왕은 당황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오르자 적이 여러 겹을 에워쌌는데, 갑자기 안개가 끼어 지척을 구별 못하게 되므로 적은 신(神)이 돕는다 여겨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 二十八年夏四月倭兵圍金城十日糧盡乃歸王欲出兵追之左右曰兵家之說曰窮寇勿追王其舍之不聽率數千餘騎追及於獨山之東合戰爲賊所敗將士死者過半王蒼黃葉馬上山賊圍之數重忽昏霧不辨咫尺賊謂有陰助收兵退歸」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2년(A.D 459년) 여름 4월 왜인(倭人:註 대마도 임나연정 군사)이 병선(兵船) 100여 척을 가지고 와서 동변(東邊)을 습격하고 내처 월성(月城)을 포위하여 사면에 화살이 빗발 같았는데, 왕이 굳이 성을 지키니 적이 물러가기 시작하므로, 군사를 내어 쳐 무너뜨리고 달아나는 자를 추격하여 해구(海口)에 다다르니 적의 반수 이상이 물에 빠져 죽었다. 二年春夏四月倭人以兵船百餘소襲東邊進圍月城四面矢石如雨王城守賊將退出兵擊敗之追北至海口賊溺死者過半」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5년(A.D 462년) 여름 5월 왜인(倭人:註 대마도 임나연정 군사)이 활개성(活開城)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사람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五年夏五月倭人襲破活開城虜人一千而去」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6년(A.D 463년) 봄 2월 왜인(倭人:註 대마도 임나연정 군사)이 삽량성(揷良城)을 침범(侵犯)하여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니 왕은 벌지(伐智).덕지(德智)에게 왜인을 치도록 명하였다. 덕지는 군사를 거느리고 길목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들이쳐서 크게 무너뜨렸다. 왕은 왜인(倭人)이 자주 국내를 침범하는 까닥으로 바닷가에 2성을 쌓았다. 六年春二月倭人侵揷良城不克而去王命伐智德智領兵伏候於路要擊大敗之王以倭人屢侵疆場綠邊築二城」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9년(A.D 476년) 왜인(倭人:註 대마도 임나연정 군사)이 동변(東邊)을 침범하니 왕은 장군 덕지(德智)를 시켜 쳐 무너뜨리고 2백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十九年夏六月倭人侵東邊王命將軍德智擊敗之殺虜二百餘人」
「자비마립간 20년(A.D 477년) 여름 6월 왜인(倭人:註 대마도 임나연정 군사)이 병력을 동원하여 다섯 길로 들어와 침략하였으나 마침내 소득없이 물러갔다. 十九年夏六月倭人侵東邊王命將軍德智擊敗之殺虜二百餘人」
실성이사금기(實聖尼師今紀) 4년조, 6년조에 나오는 왜는 구태백제와 멸망한 응신조 왜 잔존무리이고, 실성이사금기(實聖尼師今紀) 14년조에 나오는 왜는 구태백제이며, 실성이사금기(實聖尼師今紀) 1년조와 눌지마립간기(訥祗痲立干紀),2년조, 15년조, 28년조, 자비마립간기(慈悲麻立干紀) 2년조, 5년조, 6년조, 19년조, 20년조에 나오는 왜(倭)는 A.D 400년에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대마도에 설치한 임나연정(任那聯政)이다. 신라는 A.D 418년에 고구려로부터 인질을 돌려받고 또 임나연정에 인질로 가 있던 미사흔이 도망 온 후부터 고구려에 복속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신라는 A.D 418년 이후 임나연정의 공격을 자주 받았다.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4년(A.D 482년) 5월 왜인(倭人)이 변경을 침범하였다.五月倭人侵邊」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8년(A.D 486년) 여름 4월 왜인(倭人)이 변경을 범하였다.夏四月倭人犯邊」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19년((A.D 497년)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범하였다.夏四月倭人犯邊」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22년(A.D 500년) 왜인이 장봉진(長峯鎭)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春三月倭人攻陷長峯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구이신왕을 마지막으로 온조백제의 대가 끊어진 후부터 구태백제가 왜(倭)로 적혀 있지 않고 백제로 적혀 있다. 그리고 임나연정은 A.D 479년에 멸망하였다. 따라서 소지마립간기(炤知麻立干紀) 4년조, 8년조, 19년조, 20년조에 나오는 왜인(倭人)은 구태백제나 임나연정의 군사가 아니고 약탈을 목적으로 신라의 변경을 침범한 대마도(對馬島)나 일본열도 방면의 왜인들이다.
【마무리】
이상이 왜와 한반도의 관계였다. 고대 왜는 한반도인이 형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유물, 유적의 한반도성을 부정할 수가 없다. 더욱이 그들에게서 흐르는 민족의 피는 분명 얼마일지는 모르지만 한반도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우는 역사 또한 한반도의 역사를 부정할 수 없으리라 만큼 닮아 있다. 그들의 역사를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를 함께 이야기하고 논의하는 시대가 되어야 분명 한반도의 왜와 왜의 한반도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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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23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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