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Ⅱ 고대의 전쟁
1.전쟁과 사회발전단계
2.전쟁의 원인과 목적
3.전쟁의 양상
4.전쟁과 의례
5.전쟁의 무기-6.7세기를 중심으로
Ⅲ 맺으며
Ⅱ 고대의 전쟁
1.전쟁과 사회발전단계
2.전쟁의 원인과 목적
3.전쟁의 양상
4.전쟁과 의례
5.전쟁의 무기-6.7세기를 중심으로
Ⅲ 맺으며
본문내용
는 모양과 장식에 따라 그것을 소지한 군관의 지위가 높고 낮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장악하는 군사구의 범위와 거기에 편성된 군사조직의 통제지휘권을 상징하는 도였다. 6~7세기 신라의 경우에 용봉환두대도는 6정의 장군이 패용하였는데, 이는 곧 바로 왕경과 5주로 나누어진 신라 군관구의 중심축을 의미 하였다. 』 위와 같은 논문에서 발췌
Ⅲ 맺으며
이상과 같이 비교적 간략하게 전쟁에 대해서 다루어 보았는데 솔직히 고대의 전쟁에서 어떠한 부분에 초점을 맞출것인가에 대해서 서로 다른 글이 나올 수 있는데 본인은 본인의 역량이 좀 미흡하여 고대의 전쟁에 대해서 고대국가에서 정복형태로서 전쟁을 다루었다.
우리는 고대상에 있어서 모르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예를들면 각 나라에 있어서 인구가 얼마였나?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에 대한 단서로서 전쟁에 동원된 군사규모로서 그것을 유추 해석 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이 리포트를 쓰기 위해서 여러 다른 서적을 참고 하여보았지만 고대 전쟁에 관한 참고서적이 자세히 일목요연하게 쓰여진 책이 별로 없었는데 논문2개를 참고하여 이글을 거의 요약하다 시피 썼다.
진정 고대에서의 전쟁은 어떠한 의미가 있었을까? 같은 예맥족이면서도 고구려와 부여는 싸움을 하였다. 그들에게서 종족 개념이란 것이 있었을까? 물론 백제가 저들 스스로 부여씨라고 칭한 것을 보면 종족개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한(성읍연맹국가)시절부터 통일 신라 말기까지 그들이 행한 전쟁은 역사진행에 있어서 불가피한 선택이였다.
★참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전쟁에 대한 글들
가야인이 남부를 습격하므로 가성주 장세를 보내어 막게 하였으나 적에게 죽었다.
왕이 노하여 용사 5천을 거느리고 나가 적을 패배시키고 포획함이 심히 많았다.
-삼국사기 권 1 피사 이사금 17년9월
왕이 친히 가야를 정벌하려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를 건너니 가야인은 군사를 덤불속에 숨겨놓고 기다렸다. 왕이 알지 못하고 직진하니 복병이 일어나 여러겹으로 포위하므로, 왕이 군사를 지휘하여 힘껏 쳐서 포위를 뚫고 물러났다.
-지마 이사금 4년7월-
일길찬 홍선을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고 왕도 또한 기병 8천을 이끌고 漢水로부터 임하니 백제가 두려워 하여 약탈해간 남녀를 돌려주고 화해를 청하였다.
-아달라 이사금 14년 8월-
왜인이 갑자기 닥치어 금성을 포위하므로 왕이 친하 나가 싸우니 적이 패하여 흩어져 달아나느지라 ?기를 보내어 이를 추격하여 1천여급을 살획하였다.
- 조분이사금 3년 4월-
왜병이 와서 명활성을 치다가 이기지 목하고 돌아가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신 남에서 이를 요격하여 두 번 싸워 파하고 300여급을 살획하였다.
-실성이사금4년 4월
왜병이 금성을 포위한지 10일에 양식이 다하여 돌아가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이를 추격하려 하매 좌우가 가로되 병가의 설에 궁한 도적을 쫓지말라 하였으니 왕은 그만두시라 하였다. 왕은 듣지 않고 수천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독산 동편까지 합전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장사의 죽은 자가 반을 넘었다. 왕이 어찌할 겨를이 없이 매우 급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오르니 적이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혼연히 날이 어둡고 안개가 끼어 지척을 가릴 수 없게 되어 적이 이르기를 신의 음조가 있다고 하고 물러갔다. -눌지 이사금 28년 4월
고구려가 북한 산성을 침범하니 왕이 친히 군사 1만을 이끌고 가서 막았다.-진평왕 25년 秋8월
참고 문헌
한국역사 속의 전쟁 -한국역사 연구회 지음 청년사1997년판
논문 한국고대사 논총 7집중 “6~7세기의 무기. 무장과 군사조직의 편제”
한국고대사 연구 16집 “고대의 전쟁과 국가형성”-이영식
Ⅲ 맺으며
이상과 같이 비교적 간략하게 전쟁에 대해서 다루어 보았는데 솔직히 고대의 전쟁에서 어떠한 부분에 초점을 맞출것인가에 대해서 서로 다른 글이 나올 수 있는데 본인은 본인의 역량이 좀 미흡하여 고대의 전쟁에 대해서 고대국가에서 정복형태로서 전쟁을 다루었다.
우리는 고대상에 있어서 모르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예를들면 각 나라에 있어서 인구가 얼마였나?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에 대한 단서로서 전쟁에 동원된 군사규모로서 그것을 유추 해석 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이 리포트를 쓰기 위해서 여러 다른 서적을 참고 하여보았지만 고대 전쟁에 관한 참고서적이 자세히 일목요연하게 쓰여진 책이 별로 없었는데 논문2개를 참고하여 이글을 거의 요약하다 시피 썼다.
진정 고대에서의 전쟁은 어떠한 의미가 있었을까? 같은 예맥족이면서도 고구려와 부여는 싸움을 하였다. 그들에게서 종족 개념이란 것이 있었을까? 물론 백제가 저들 스스로 부여씨라고 칭한 것을 보면 종족개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한(성읍연맹국가)시절부터 통일 신라 말기까지 그들이 행한 전쟁은 역사진행에 있어서 불가피한 선택이였다.
★참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전쟁에 대한 글들
가야인이 남부를 습격하므로 가성주 장세를 보내어 막게 하였으나 적에게 죽었다.
왕이 노하여 용사 5천을 거느리고 나가 적을 패배시키고 포획함이 심히 많았다.
-삼국사기 권 1 피사 이사금 17년9월
왕이 친히 가야를 정벌하려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를 건너니 가야인은 군사를 덤불속에 숨겨놓고 기다렸다. 왕이 알지 못하고 직진하니 복병이 일어나 여러겹으로 포위하므로, 왕이 군사를 지휘하여 힘껏 쳐서 포위를 뚫고 물러났다.
-지마 이사금 4년7월-
일길찬 홍선을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고 왕도 또한 기병 8천을 이끌고 漢水로부터 임하니 백제가 두려워 하여 약탈해간 남녀를 돌려주고 화해를 청하였다.
-아달라 이사금 14년 8월-
왜인이 갑자기 닥치어 금성을 포위하므로 왕이 친하 나가 싸우니 적이 패하여 흩어져 달아나느지라 ?기를 보내어 이를 추격하여 1천여급을 살획하였다.
- 조분이사금 3년 4월-
왜병이 와서 명활성을 치다가 이기지 목하고 돌아가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신 남에서 이를 요격하여 두 번 싸워 파하고 300여급을 살획하였다.
-실성이사금4년 4월
왜병이 금성을 포위한지 10일에 양식이 다하여 돌아가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이를 추격하려 하매 좌우가 가로되 병가의 설에 궁한 도적을 쫓지말라 하였으니 왕은 그만두시라 하였다. 왕은 듣지 않고 수천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독산 동편까지 합전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장사의 죽은 자가 반을 넘었다. 왕이 어찌할 겨를이 없이 매우 급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오르니 적이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혼연히 날이 어둡고 안개가 끼어 지척을 가릴 수 없게 되어 적이 이르기를 신의 음조가 있다고 하고 물러갔다. -눌지 이사금 28년 4월
고구려가 북한 산성을 침범하니 왕이 친히 군사 1만을 이끌고 가서 막았다.-진평왕 25년 秋8월
참고 문헌
한국역사 속의 전쟁 -한국역사 연구회 지음 청년사1997년판
논문 한국고대사 논총 7집중 “6~7세기의 무기. 무장과 군사조직의 편제”
한국고대사 연구 16집 “고대의 전쟁과 국가형성”-이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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