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불교<화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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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 나라의 불교<화엄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불교중에서도 화엄종의 전파에 보다 관심을 가진 의상에 대해
그가 강조했던 화엄종에 대해
참고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화엄종의 인적 계보와 사상의 본질 및 신라 하대 화엄의 경향
법계연기설을 다시 해석

본문내용

유대와 결속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화엄조사를 기린 것은 사상계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 데에 대한 자기반성 내지 자기방어의 의미가 있었다고 보인다. 결사의 내용과 형식은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지배계급과 밀착된 화엄승들의 보수적인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중대와 달리 지방의 민중 속으로 파고들지 못한 하대의 화엄승들은 쇠잔해가던 권력의 심층부에 적극적으로 기생하여 명맥을 유지해나갔던 셈이다. 대표적인 것이 헌강왕 이후 진성왕의 원찰이었던 해인사이다. 따라서 지배계급과 유착한 화엄승들의 보수적이고 자폐적인 모습이라든가, 주통(州統)이나 군통(郡統) 따위의 연락관을 자임한 중간층 승려들의 어용화 과정에서, 세속권력과 함께 몰락해가는 화엄종의 모습을 읽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여, 지지세력의 상실과 영역의 축소를 야기한 경주 중심과 진골 위주의 파행적 지배체제, 즉 고대적 유제(遺制)의 문제점을 각종 화엄결사와 「초월산 대승복사비」에서 표현하였듯, 원성왕계로 복귀함으로써 재정비하려 했던 신라 말 역대 왕들의 복고적인 시도와, 시대정신을 제시하지 못하고 현학적 세계에 몰두하여 신앙계층과 지역이 축소된 화엄종의 역대조사로의 신앙복귀는, 시대의 격동적인 변화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우리는 의상과 화엄종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화엄종의 전파에서부터 신라 전기에서 후기까지의 화엄종의 위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종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데 정신적인 힘이 되며 시대가 변함에 따라 종교 역시 달리 수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월드컵을 계기로 온 국민이 붉은 악마라 하여 하나로 똘똘뭉쳤다. 하나의 지주 즉 축구로 우리나라의 일치 단결한 모습은 대한민국의 장래를 밝게 해줄 것이다. 종교적인 단결 이상의 것으로 생각한다. 화엄종 역시 그 시대에는 하나의 지주였을 것이다.
(참고자료 출처)
http://www.seoul-gchs.seoul.kr/~youngha/orient/eastword/easthi9.htm
http://myhome.hananet.net/~yychoi/13.htm
http://www.pusoksa.org/h-um/h-um_7-3.htmlc
http://www.cue.ac.kr/~moed/lecture/kthought/k-th04-1.htm
추만호, "신라하대 사상계의 동향" {한국사: 중세사회의 성립} 한길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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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27
  • 저작시기2004.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8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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