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기원과 원인에 대한 분석_커밍스의 저작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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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해방 3년사의 쟁점들 : 부루스 커밍스의 연구를 중심으로
1. 머리말
2.『한국전쟁의 기원』의 이론적 가설
3. 사회구성체론과 관료사회, 세계체제론
4. 일제하 사회성격의 모호성
5. 제국주의냐 관료정치냐
6. '경험주의'의 함정
7. 주관적 문화주의
8 혁명의 주체
9 결론에 대신하여

Ⅱ. 한국전쟁과 이데올로기 지형
1. 문제의 제기
2. 방법론적 문제
3. 한국전쟁과 이데올로기 지형
4. 한국전쟁과 국가
5. 한국전쟁과 지배연합
6. 결론에 대신하여

본문내용

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자본주의의 급속한 발달의 원동력의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국가체제라는 측면에서 한국전쟁은 분단국가 체제의 고착화 내지 최종적 봉인을 유발했다. 즉, 남북한 사회가 전쟁 이후 두개의 독자적 사회구성체 내지 국민국가로 정착해 '1민족 2국가'의 분단국가체제가 고착화하게 되었다.
2)국가기구의 변화
국가기구의 과대성장성을 특징으로 하는 식민지 국가 중에서도 한국은 일제하에서 특히 과대성장된 국가기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이처럼 초과대성장된 국가기구 특히 억압적 국가기구를 반혁명전략과 관련하여 더욱 팽창시켰고, 이 같은 추세는 분단국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시기
지역
군인수
경찰수
해방전
남북
약 10,000
약 8,000
해방후(1945)
남한
약 15,000
(1943)
남한
약 45,000
약 64,000
한국전쟁 직전
남한
약 48,000
약 113,000
한국전쟁중
남한
약 63,000
약 700,000
전쟁 종전 후
남한
약 33,000
약 600,000
위의 표와 같이 특히 억압적 국가기구의 팽창의 결정적 계기가 한국 전쟁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자연적 결과라는 것이 있지만, 이는 당시 남한의 물적 토대, 재정적 자원동원 능력이란 면에서는 불가능했고 한국전쟁의 발발과 미국의 대규모 군사원조에의 의해서 유지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별로 설득력이 없다.
두 번째 한국전쟁이 국가기구에 끼친 영향의 특징은 억압적 국가기구의 내부구성의 변화이다. 즉, 군의 중요성의 급속한 부상과 경찰의 상대적 지위하락이다. 이같은 군의 팽창은 중장기적으로 볼 때 6년 이후 현재까지 한국정치의 톤을 규정해온 군의 정치참여와 장기간의 군부통치의 초석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군부파시즘의 등장을 통해 한국경제의 종속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돌입을 매개하는 구실을 수행하도록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은 국가기구 중 입법부의 역할의 대폭적인 우축과 행정부의 강화를 가져옴으로써 독재체제의 지속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그전까지 국회의 견제에 고통을 받아온 이승만정권은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62년 세칭 부산정치위기를 통해 대통령직선제를 관철시키고 행정부의 강화를 획득하였으며, 이후에도 한국전쟁으로 고착화된 분단대치 상황은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이라는 명분 하에 이 같은 행정부 독주체제의 지속을 가능케 하였다.
5 한국 전쟁과 지배연합
한 국가의 지배연합의 범위규정은 여러 가지 문제가 따른다. 즉, 국가기구 운영세력을 포괄시킬것인가, 특히 제3세계의 경우 해외독점자본과 같은 외세까지도 직접 지배연합에 포괄시킬 것인가가 대표적 문제이다. 여러 입장을 종합해 볼 때, 한국 전쟁 전 지배연합을 형성하고 있던 것은 (미국과) 지주계급(및 미국), 친일매판자본, 귀속재산 불하를 통해 새롭게 등장한 친미자본, 및 미군정에 의해 재등용된 친일관료 및 경찰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군은 국가기구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지배적인 사회범주로서 지배계급의 한 구성요소가 될 정도로 성숙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지배연합에 한국전쟁이 끼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지주계급의 몰락이다. 당시 전체농지의 65%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막강한 세력을 행사하던 지주들은 1952년 말에는 개인적 거래나 농지개혁 등을 통해 그 물적 토대와 정치적 권력을 상실하고 사실상 지배연합으로부터의 탈락과 계급 해체를 겪게 되면서 몰락하게 된다.
물론 식민지 반봉건 사회주의론자들의 경우 이 같은 사회성격론에 맞추어 지주계급의 해체를 부인하고 '친미주의'를 한국의 주요한 지배연합 세력으로 파악하고 있기는 하다. 농지개혁이 '무상몰수, 무산분배'의 형식이 아니고 '유상매수, 유상분배'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등 불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처럼 '친미지주'가 지배연합세력으로 버젓이 살아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실의 왜곡이라 할 수 있다. 또 농지개혁과 이에 따른 지주계급의 몰락이 과연 '순수하게' 한국전쟁의 영향인가 하는 의문도 제기 가능하다. 비록 농지개혁안이 한국전쟁 이전에 통과되었다고는 하지만 지주계급의 저항 등으로 이의 원만한 집행에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최소한 한국전쟁이 이 같은 몰락의 가속제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지주계급의 몰락과 관련되 한국전쟁의 또다른 영향은 '예속자본'이라 부를 수 있는 토착자본의 특정 분파의 지배블록내 위치의 상대적 부상이다.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일제의 잔재인 친일자본과 귀속재산 처리로 새롭게 등장한 친미자본이 혼재해 있었으나 이후 거의 친미일변도에 가까울 정도로 미국 독점 자본의 하위동맹자로 모두 재편하게 된다. 이 같은 예속자본을 1950년대의 '전기적 독점' 과정과 자본주의의 일반법칙 중의 하나의 독점화경향을 거쳐 예속독점자분으로 탈바꿈하여(해외독점자본과 함께) 지배연합의 기본축을 형성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은 군의 '이상비대화'를 가져옴으로써 궁극적으로 지배적 사회범주로서의 군을 3공화국 이후 지배연합의 중요한 한 구성요소로 부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에 대신하여
여기서는 한국전쟁이 한국정치의 이데올로기 지형과 국가, 지배연합에 끼친 영향을 개괄적으로 분석하였다.
이데올로기 지형의 경우 한국전쟁은 해방정국의 '좌경 반쪽 지형'을 '우경 반쪽 지형'으로 전환시키고 이에 따라 정치적 주체로서의 계급의 저발달을 가져와 궁극적으로 '무자비한' 자본축적을 통한 자본주의 발달을 가능케 했다. 국가의 경우 한국전쟁은 그전의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강화시키는 한편 분단국가체제의 최종적 봉인을 했다. 국가기구 면에서도 '초과대성장'된 국가기구, 특히 군의 부상과 이에 따라 종속(군사)파시즘의 대두를 통한 종속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을, 행정부의 강화에 따른 독제체제 지속을 용이하게 하였다. 한국전쟁은 지배연합면에서도 친일지주의 몰락과 예속자본의 부상, 지배적 사회세력으로서의 군의 등장 등을 유발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한국전쟁의 정치적 영향 분석은 보다 엄밀하게 분석되고 체계화 될 때 한 단계 높은 질적 도약을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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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3.13
  • 저작시기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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