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3년사 (1945~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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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해방 3년사 (1945~1948)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1) 서론
2) 미군정의 국내정치세력에 대한 정책
ㄱ. 인민 공화국에 대한 조치
ㄴ. 한민당과의 협력
3) 의의

2. 미군정의 토지문제와 토지개혁
1) 역사적 배경
2) 미군정기 각 정파의 토지개혁에 대한 입장
ㄱ. 북한과 남한의 공산주의 세력
ㄴ. 여운형계의 중도사회주의 세력
ㄷ. 이승만과 한민당의 보수우익 세력
3) 토지문제와 토지개혁의 의의

3. 해방 3년사의 좌우익 대립
1) 외인론과 내인론으로본 좌우익 대립
2) 외인론+복합론(외부+내부)에 의한 좌파와 우파의 대립

4. 결론

본문내용

주도된 인민공화국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지만 미군정이 초기에 지원한 세력이다. 마찬가지로 이승만은 반탁, 반공을 고수, 공산주의와의 타협을 거부함으로써 범 좌익과 대결했고 단독 정부론을 주도하여 김구, 김규식의 임정계와 결별했으며 결과론적으로 미군정의 지원과 한민당의 지지로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었다.
(2)좌익세력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세력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통한 국가건설과 사회개혁을 내세웠고 친일파의 철저한 숙청을 주장하여 우파인 한민당과는 적대적일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고 이들은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지만 공산당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미군정에 의한 우파들에게 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3)중간파세력
중도좌파인 여운형은 좌우를 규합할 대중적 지지를 지닌 유일한 정치지도자였지만 그는 해방 초기부터 좌파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좌우대결이 심화되던 와중에서 피살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도우파인 김규식은 타협에 의한 통일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도덕적 명분과 미국의 지원이라는 힘의 자원을 가지고 있었으나 좌우의 대결 속에서 조직적 기반이 취약하였다.
(4)내인론과 복합론적인 좌파와 우파의 대립
내인론은 민족내부간의 갈등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 1945년 8월14일 여운형의 집에 건국비밀 동맹원이 찾아와 곧 일본천황이 항복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에 여운형은 일제가 패망하고 아직 정부가 수립되지 못한 공백기에 인민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정치조직을 만들 것을 다짐한다. 안재홍을 찾아가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이로써 건준은 좌파, 중도, 우파 망라할 것 없이 조직 되어서 초기 한국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건준내의 유일한 우파인 안재홍 계열은 미군이 진주한다면 우익의 발언권이 커질 것이고 우익은 기존 조직에 참여하기보다는 단독 '임시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하여서 탈퇴를 하였다. 또 한편으로 박헌영은 건준을 극좌적으로 이끌어 감으로써 내부 균열을 주도했다. 그래서 이런 시국에 대처하여 이 조직을 모태로 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정부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이승만을 귀국시켜서 남한의 통치자로 내세울 채비를 하였다. 이승만이 들어온다면 좌파와 우파의 대립은 뻔하며 이런 지지적 기반이 없는 친미인 이승만을 내세우기 위해 미국은 한민당과 연결을 시켜 이승만 정권을 세우는데 힘이 되어 주었다.
1945년 12월27일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으로 한반도에 대한 5년간의 신탁통치결정은 복합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신탁통치안의 발표 후 각종 우파정치 단체가 민족주의자 중심으로 탁치반대 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미.소양군의 철수, 임정의 승인등을 탁치반대를 결의한다. 이와 동시에 공산당의 박헌영도 반탁 의사에 동의를 한다. 그러나 46년 1월11일 인민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한 좌파측은 "신탁통치안은 조선독립을 달성하는 순서이며 충분한 진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며 찬탁을 결정하였다. 이에 우익측은 좌익을 민족의 반역자 노예근성. 신사대주의 라고 몰아부쳐 갔다. 좌익측도 이에 대응하여 신탁통치안이 일본에 대신한 미.소의 재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의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려했다. 이런 문제가 제기가 된 후 우파는 좌파보다 외세의 지원으로부터 고립이 되어 반탁운동에서 철저한 反共운동으로 전개해 나갔고 좌파는 친일파 숙청, 토지문제와 농지개혁과 8시간 노동제를 내걸고 좌파세력을 끌어 모아 우파와 대립을 하게 되었다. 이러던 중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이 되자 이승만은 1946년 6월3일 정읍발언을 통해 더 이상 좌파들과는 협상을 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남한 단독정부라도 수립할 것을 주장한다. 또한 좌익은 미군정 당국에 의해 공산당 간부 체포령, 인민, 현대, 중앙 3개 신문 정간처분을 받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외세에 의한 좌파에 대한 공격이었고 여기에 대응하여 9월 총파업, 10월 대구폭동등을 일으켰고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가 되었으나 1차와 마찬가지로 결렬이 되자 미국은 자기의 세력에 있던 UN에 한국문제를 이양시키고 종례의 미.소 협상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버리고 이승만의 단정수립을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게 됨으로써 남북분할을 가져다 주었다. 분할 그 자체는 외세가 가져다 준 것이지만 분단고착화는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결론
미군정 3년간의 기간은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는 상당히 짧은 시간이지만 그 이전 시기에는 일제 식민지가 있었고 그 이후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 가장 큰 아픔을 안겨준 두 사건을 연결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좌우대립이 극심하고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다. 또한 사실상 진정한 해방을 맞지도 못한 시기이기도 하다. 미군정에 의한 지배, 민족적 정통성이 전혀 없는 친일 반민족적 세력들이 미국에 편승하여 민족의 이상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가는 그리하여 그 이후로 60년이 지나도록 한 사회의 옳고 그름의 근본부터 시작하여 사회 전반의 모든 체제를 바꿔버린 어찌 생각하면 일제 지배보다 더 수치스러운 시기이기도 하다.
민족적 정통성을 갖고 있던 세력들의 국제정세에 대한 무지. 전쟁에 참여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전승국으로서 대접을 받으려 했던 그들의 판단력과 소위 당시의 엘리트 계층 그리고 부유층이라고 할 수 있는 한민당 세력의 민족의 장래는 전혀 생각지 않는 무조건적인 자기이익을 위한 정치 투쟁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은 그 후 왜곡되고 뒤틀어진 역사를 겪어오게 된다. 이는 물론 당시 자신들의 민족에 대한 큰 과오를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은 이승만을 비롯한 집권세력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또한 좌익계열에게도 자신들의 이념보다는 민족을 우선한 판단이 앞섰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조주의적 판단만을 일삼으며 대중적 지지가 충분했음에도 그것을 기회로 살리지 못한 잘못이 있을 것이다. 또한 해방이후 한국정치의 중요한 시기마다 곳곳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미국의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점령정책에 대한 비판도 피할길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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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3.20
  • 저작시기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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