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왕자 - 가우스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수학의 왕자 - 가우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가우스의 유년기와 대학 재학 시절

2. 천문학

3. 수론과 함수론

4. 물리학에서 가우스의 업적

5. 말년

본문내용

어려운 이유 중의 한 가지이다.
4. 물리학에서 가우스의 업적
기하학 및 측지학, 뉴턴의 인력이론 및 전자기학에 수학을 응용해서 두드러진 진보를 성취시킨 것도 역시 가우스였다. 어째서 한 사람의 인간이 이와 같은 거대한 최고급의 일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가우스는 항상 겸손하게 이렇게 단언한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내가 했던 것과 같이 끊임없이 수학적 진리에 깊이 몰입했더라면 내가 이룬 발견을 그들도 성취했을 것입니다.” 혹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가우스의 이와 같은 설명은 뉴턴의 말을 상기시킨다. 천문학에서 앞서 간 모든 사람들을 능가할 발견을 어떻게 성취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뉴턴은 “항상 그 일을 생각함으로써”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뉴턴에게는 지당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자기 자신의 사고의 세계로 스스로를 몰입시킬 수 있는 이 능력에서 가우스는 아르키메데스와 뉴턴, 이 양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 게다가 두 가지 점에서도 그는 양자에 필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정확한 관찰능력과 자기의 과학연구에 필요한 기구를 스스로 고안해 내는 과학적 발명의 재능이다. 측지학에서 사용하는 회광기(回光器)의 발명은 가우스 덕분이고, 이것은 반사광에 의하여 신호를 실제적으로 즉각 전달하는 재치있는 장치였다. 당시 회광기는 장족의 진보를 가져왔다. 가우스가 쓴 모든 종류의 천문기구도 역시 그의 손으로 눈부시게 개선되었다. 전자기학의 기본적 연구에 사용하기 위해 가우스는 두 가닥 실로 자력계(磁力計)를 발명했다. 또 그의 기계적 재치는 마지막으로 1833년에 전신기(電信機)를 발명하였고, 그와 그의 협력자 빌헬름 베버가 당연하게도 그것을 통신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일이다. 수학적 천재와 일류급 실험능력과의 결합은 모든 과학계에서도 가장 보기 드문 조화에 속한다.
가우스 자신은 발명의 실제적 효용을 거의 마음에 두지 않았다. 아르키메데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지상의 왕국보다는 수학 쪽을 선택하고, 자기 노동의 구체적 결실의 수확은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그래도 전자기학 연구에서 그의 협력자인 베버는 괴팅겐의 작은 전신기가 문명으로서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잘 알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철도가 바로 1830년대 초기에 실용화되었던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 베버는 1835년에 예언했다. “지구가 철도와 전선의 그물로 덮여질 때 그 그물의 반은 운수기관으로, 반은 사상과 감정을 빛의 속도로 전파하는 수단으로써 인체에서의 신경조직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1821년부터 1848년까지 가우스는 하노버 정부(당시 괴팅겐은 하노버 정부의 관할 하에 있었다)와 덴마크 정부의 측지사업에 관한 학술고문을 맡고 있었다. 그의 최소제곱법 및 방대한 수학적 자료를 취급하는 연구의 교묘함이 십분 발휘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지표면의 일부에 대한 정밀측정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모든 곡면에 관련된 보다 깊고, 보다 일반적인 문제를 시사했다는 것이다. 이들 연구는 나중에 상대론을 낳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문제는 새로운 것은 아니고, 가우스의 선배, 특히 오일러, 라그랑주 및 몽주가 곡면의 어떤 형에 관한 기하학을 연구했던 일은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일반적인 경우의 문제로 착수한 것은 가우스가 처음이었고, 그의 연구로부터 미분기하학 최초의 위대한 시기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미분기하학이란 한 점의 바로 근방에 있는 곡선곡면 및 그 밖의 고차 공간의 성질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거리의 2차 이상의 항은 생략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이 연구에서 영감을 받아 리만은 1854년에 기하학의 기초를 이루는 가설에 관한 그의 고전적 박사논문을 발표했다. 이것은 오늘날 수리물리학, 특히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유용한 미분기하학의 제2의 위대한 선구가 되었다.
다른 과학 분야에 대해서도 가우스는 기본적인 연구로 공헌했다. 지자기를 포함하는 전자기학의 수학적 이론, 모세관 현상, 뉴턴의 인력법칙에 의해 생기는 회전타원체(행성은 특별한 종류의 회전타원체이다) 및 광선굴절학, 특히 렌즈계에 관한 것 등이 그 예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청년시대에 정수론에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발표했던 순수히 추상적인 기술(연분수)을 응용할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가우스는 이러한 모든 것에 탁월한 수학자임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손이나 눈을 사용하는 제일급의 훌륭한 관측자이기도 했다. 특히 전자기학 연구와 인력이론에서 그가 발견한 많은 전문적인 정리는 물리과학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모든 연구자에게 불가결한 소재가 되었다. 오랜 해를 거듭하면서 가우스는 친구 베버의 도움을 얻어 모든 전자기 현상에 관한 만족할 만한 이론을 탐구했다. 생각한 대로의 결과를 얻을 수 없어서 그 계획은 포기했지만, 만일 그가 제임스 클라크 맥스웰의 전자장 방정식을 발견했더라면 만족했을는지는 모르겠다.
5. 말년
가우스의 만년은 명예로 장식되어 있었다 해도 그만큼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의 왕성한 정신과 풍요한 발명적 재능은 예전과 다름없었고, 죽기 수개월 전 마지막으로 병의 징후가 나타났을 때에도 가우스는 휴식을 취할 생각도 안했다. 그는 심장이 비대해지고 숨결이 가파르게 되어 매우 괴로워했고, 부종의 징후가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상이 허용하는 한 연구를 계속했다. 더 한층 그의 손은 결련이 일어났고 그 아름답고 명석한 집필은 마침내 무너졌다. 그의 마지막 편지는 전신기의 발명에 대해 데이빗 브루스터 경에게 보낸 것이었다. 거의 최후까지 의식을 잃지 않고 살려는 격렬한 고투가 있은 다음인 1855년 2월 23일 이른 아침, 그는 77세로 평온하게 죽었다.
2월 26일의 장례식은 학계 이외의 사람들도 참여하여 학교장으로 치러졌다. 영예의 월계관을 쓰고 묘지의 전망대 천정 아래 단 위에 뉘어졌으며, 관은 데데킨트(Dedekind)를 포함한 12명의 학생들에 의하여 운반되어 괴팅겐의 세인트 알반스 공동묘지에 묻혔다.
참 고 문 헌
1. 수학을 만든 사람들(미래사)
2. 수학의 황제 가우스(경문사)
3. 네이버 백과사전(www.naver.com)
4. 數學의 世界(서울大學校 出版社)

키워드

가우스,   유년기,   천문학,   수론,   함수론,   물리학,   수학,   왕자

추천자료

  • 가격2,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5.03.21
  • 저작시기2005.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8896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