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에 대한 연구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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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정약용의 생애 살펴보기
2. 정약용의 생애와 연관지어 알아보는 그의 사상적 흐름과 그 관계
3. 정약용의 유배문학 중 시문학의 특징
4. 유배지와 관련된 문학작품 알아보기. (다산초당, 동림사, 고성사)

본문내용

사의재에서 기거할 때, 자기의 친 외가인 해남의 연동이나 백포에서도 손을 저으며 거절하고 파문괴장하고 달아나던 무서운 시절에, 안접을 허락했던 읍내의 무지렁이들이다. 읍내의 보잘것없는 집안의 손병조, 황상, 이청, 김재정 등 다산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두 번째는 뒷날 다산의 딸이 시집가는 향촌의 윤씨 일가다. 다산 아버지의 친구이자 당대의 큰 부호이던 윤광택은 다산을 여러모로 도와주었다. 셋째는 다산초당의 주인이던 귤림처사 윤단의 후손들인 귤동의 윤씨 일가다. 누추하고 비좁은 사의재에서 다산을 다산초당으로 초대하여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수많은 저서를 완성하도록 숙식을 제공하며 풍광이 아름다워 세월 보내기 즐겁고, 가까운 곳에 백련사가 있어 소요하기 편하고, 마을 앞에는 조수가 밀려드는 구강포가 있어 뱃놀이와 고기잡이에 시름을 잊었던 다산초당이야말로 다산학의 산실이 아닐 수 없다. 마음놓고 사색하고 연구하며, 눌린 자의 억울함에서 벗어나 생의 즐거움을 느끼며 본격적인 연구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모두 귤동 윤씨 일가의 배려가 있었던 탓이다. 그들의 후손들은 해방 후 흔적도 없어진 다산초달을 복원하여 오늘날 초당이 덩실한 모습으로 건재하게 해주었고, 많은 다산의 기록을 보관하여 그때의 일을 알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넷째는 다산의 피가 연결되는 다산의 외가 해남의 윤씨들이다. 처음에 그를 박절하기도 했지만 피를 속일 수 없다는 듯 유배 만년의 다산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해남 대흥사의 큼 학승들인 혜장선사, 초의대사 등 불교 쪽의 도움이다. 백련사와 보은산의 고성사를 내왕하며 불경과 유교의 경전에 관해 담론했고 차와 시로 다산의 정서를 일깨워주었던 그들은 한 단계 더 높은 다산 철학의 경지를 여는 데 더없이 고마운 도움을 주었다.
(1) 다산초당(茶山草堂)
다산은 비록 죄인의 몸이었지만 ,마음과 뜻이야 죄인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그에게 주어진 다산초당의 생활은 더 이상 바랄것이 없는 선비생활을 허락해 주었다. 본래 다산초당은 귤사처사 윤단이 초가로 건립하여 후손을 가르치던 서당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8년 봄 이곳으로 유배와 유배가 끝나 고향으로 돌아가던 1818년 8월까지 18명의 제자와 함께 강학(講學)을 하던 곳이다. 1936년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57년 해남 윤씨의 협조를 받고 정다산 유적 보존회가 복원을 하면서 지붕을 기와로 덮었다. 다산초당이란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다.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대나무숲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남인 고가의 사족들의 후예들인 18명의 우수한 제자들을 얻어 신분에 걸맞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다산초당은, 확실히 그의 정신적인 안정을 보장해주던 곳이었다. 그러한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아야만 본격적인 저술활동이 가능해진다. 불타는 지식욕을 만족시킬 수 있었고, 미래를 기약할 저술활동이 가능하였던 초당에서의 독서와 저술의 매일매일은 현실적 불만을 삭일 수 있도록 넉넉하고 풍족한 생활이었다.
소나무 둑의 반반한 하얀 돌 위는
거기 바로 내가 거문고 타던 곳,
산객이 거문고 걸어두고 돌아오자
바람 따라 거문고 줄 절로 우노라.
그는 여기서 아름다운 경치와 인정에 젖으며 유배의 서러움도 잊고, 천여 권의 장서와 함께 본격적 저술과 후생 교육에 전념하였다. 다산은 바위 절벽에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겨 징표로 만들어 두었다.
(2) 동림사
동림사지는 동장대지에서 서북쪽으로 421m 거리의 해발 465m 지점에 위치한다. 동림사는 숙종 12년(1686) 봉암 외성을 신축할 때 봉암 외성의 수비를 위하여 창건한 것으로 원성 내에 있는 8개의 사찰에 비해 62년 정도 늦게 지어졌다. 지금으로부터 207년 전, 17세의 다산 정약용 선생과 21세의 다산의 중형 손암(巽庵) 정약전 선생은 40일 동안 수양과 독서를 위해서 동림사에 기거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림사의 경치가 아름답고 그윽하여 정약용 선생이 남긴 글도 여러 편 전해져 내려온다.
나한산이 무등의 남쪽으로 휘감았으니
이 산 속에 좋은 절 많기도 해라.
그중에서도 동림사가 가장 깊고 그윽하여
아늑한 분위기는 성주암과 겨루겠네. <春日烏城雜詩(춘일오성잡시)>
(3) 고성사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보은산 우두봉(牛頭峰)에 있는 사찰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반년이 넘도록 아들과 함께 묵으며 학문을 연구했던 역사적인 절이지만 지금은 많이 퇴락되었다. 유적보존이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래의 시는 1804년 겨울에 다산 선생이 지었던 <아들 학가가 찾아와 이끌고 보은산방에 이르러 짓다.>라는 시이다.
인생이란 약한 풀과 같은 것
더구나 극도로 쇠약한 몸인데서야.
풀잎의 이슬은 아침이면 마르는데
이런 의미 아는 자 그 누구냐.
다산이 이 고성사에 머물게 되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1804년 4월 17일 다산은 읍내에 있으면서, 읍내에서 멀지 않은 만덕산의 백련사로 유람을 갔었다. 거기에는 해남 대흥사의 큰 학승인 혜장선사가 묵고 있었다. 불교의 교리는 물론 유교의 경전에도 해박하고 시문에도 뛰어난 혜장은 다산의 유배 살이에 많은 도움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혜장은 다산에게 경학릉 배우고, 그 지방에서 천연적으로 생산되던 차를 권유하여 그 뒤로 다산은 다도에 일가견을 지니게 되었다. 더구나 중요한 점은 중이던 혜장의 도움으로 읍내의 협소한 움막집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깨끗한 절에서 연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고성사와 백련사를 소개해 주어, 틈만 있으면 찾아가서 펴니 쉬고 마음껏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겠는가! 더구나 백련사나 고성사는 대흥사의 말사였으니 혜장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다산 시집에는 혜장과 주고받은 수없이 많은 시가 있으니, 그들의 시흥과 우정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참고 문헌 목록>
1. 우리 역사를 찾아서(역사 연구소 지음, 심지, 1994)
2. 조선 명인전 하(문일평 외 26인, 조선일보사, 1988)
3. 한국 인물 유학사 4(조준하 외, 한길사, 1996)
4. 한국의 역사(연사 문제 연구소 지음, 웅진출판, 1996)
5. 다산기행 (박석무, 한길사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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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3.25
  • 저작시기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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