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층민 인물사 연구의 형황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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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층민 인물사 연구의 형황과 과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경향을 비판하고 조선의 산수를 그린 진경산수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대담하고 파격적인 조형양식을 이루어 조선 후기 회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작품으로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 《한강조어도》 《풍설야귀도(風雪夜歸圖)》 《수각산수도(水閣山水圖)》 등이 있다.
*. 이성미는 18세기 에 비해 19세기 조선 문화가 중국문화의 영향을 다각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추세의 일환으로 장승업을 위시한 안중식, 조석진 등의 그림에 중국회화의 영향이 감지된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여러 대가들의 필법을 여러 경로를 통해 섭렵한 후 이들을 토대로 자신감이 넘치는 필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고 칭송하였다.
*. 장승업의 고사인물화는 숙련된 기량으로 전통회화의 기반위에서 독자적인 인물화풍을 이루어낸 작간의 예술적 성취와 함께 그가 활동하던 조선 말기의 시대적 상황과 회화의 양상을 반영하는 작품으로 의미를 지닌다고 하였다.
4. 여 성
①논개 (論介 ?~1593(?~선조 26)
조선 선조 때 기생. 성은 주(朱). 전라북도 장수(長水) 출생.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왜장들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베풀고 있을 때 왜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순국했다. 그녀의 순국사실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됨으로써 문자화되었고, 그녀가 순국한 바위는 진주사람들에 의해 의암(義巖)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당시의 보수집권세력의 편견으로 그녀의 애국충정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자 진주사람들은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논개의 의열에 대해 국가가 봉작을 내려주고 사당을 건립하여 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국가는 그녀의 순국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논개를 <의기>로 지칭하게 되었다. 그 뒤 39년(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에 대한 대규모 추모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의암별제>는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기녀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추모제인데,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절차만이 전해지고 있다.
②황진이 (黃眞伊 ?~?)
조선 중기 시인. 개성(開城) 출신. 본명은 진(眞). 기명은 명월(明月). 중종 때 진사(進士)의 서녀로 태어나 어머니에게서 사서삼경을 배웠다. 15세 무렵 동네 총각이 그녀를 연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자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뛰어난 시서(書)가창 재능과 출중한 용모로 당대문인석유(碩儒)들을 매혹시켰다. 10년 수도의 생불(生佛)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고,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꾀려다 실패한 뒤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등 많은 일화가 전한다. 종친(宗親) 벽계수(碧溪守)와 깊이 교제하며 독특한 애정관을 시로 표현하였다. 서경덕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기발한 이미지와 세련된 언어구사 등으로 조선시조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그녀의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 <산은 옛 산이로되> <어져 내일이여> 등 6수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한다.
*. 소설가들에 의해 논개가 순국적 여인상에서 순애적 여인상으로 변모해가게 되고 있는 실정이다.
*.황진이 그녀는 용모가 출중하여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으나 소설에서 다루어질뿐 그 인물의 시대적 고뇌를 담은 역사서는 아직 발간되지 않았다.
<맺음말>
이상으로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연구된 하층민의 연구동향을 살펴보았다. 인물사 연구는 80년대에 들어서서 비로서 제대로 이루어 지고 있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하층민에 대한 연구는 극히 소략하며, 하층민으로 보기 어려운 인물들도 있다. 필자가 맡은 주제대로 연구된 내용을 소개하자면 엄밀하게 보아서 만적, 망이,망소이, 이의민, 신돈 임꺽정, 장길산, 논개 황진이가 전부이다 우리나라 2천년 역사에서 하층인물 연구가 얼마나 미약한지 알 수 있다..
인물사 연구는 역사를 구성하는 인간집단과 그 집단을 구성하는 개별 인간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물사에 관한 연구는 그가 살던 사회, 경제, 문화 등 제반 연구가 이루어진 이후에 비로서 풍부한 자료로 입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등 제반 역사학이 완전히 연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물사는 소설이 되기 쉽다. 특히 자료가 부족한 하층민에 대한 연구는 그 시대의 생활사에 관한 연구가 풍부해져야 제대로 그려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요즈음 나오고 있는 서양사에 관한 연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고양이 대학살) (치즈와 구데기)(전사와 농미) 등 저잗르은 미시사적 관점에서 그 시대의 인물을 충실히 그림으로서 우리는 1000년 전의 중세의 사람들의 생각, 당시의 사회상황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볼 수 있게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홍준의“화인열전” 김윤식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 그리고 나혜석 일대기를 쓴 이상경의“인간으로 살고 싶다.”를 들 수 있다. 유홍준의 경우, 비록 사회상황에 대한 역사적 인식은 생략되어 있지만 조선시대 미술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각 화가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 저자의 뛰어난 필력에 의지하여 각기 개성있는 인물들이 세상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김윤식은 이광수의 친일문제가 나오게 된 개인적인, 사회적인 문에데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경은 나혜석이 서양의 겉멋에 물들은 화가라는 부정적 이미지의 기존 틀에서 벗어나 여권론자로서 억압에 맞선 당당한 선구자적 면모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전근대의 인물을 그려내기에는 아직까지는 미흡한 상태에 있으며 하층 인물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인물사에 관한 연구는 인물 개개인의 행적을 고증하는 기본 전제위에 그 인물의 역사적인 고뇌를 묘사함으로서 보다 생동감있게 살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인물사에 대한 연구가 더 많이 활성화되기를 바란다. 이에 따라 전근대 하층 인물에 대한 연구도 자료의 부족을 뛰어넘어 그들의 모습이 보다 입체적으로 구현되기를 바란다.

키워드

하층민,   인물,   인물사,   연구,   현황,   과제
  • 가격2,000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05.04.02
  • 저작시기2005.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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