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의 현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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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역사의 현대 사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자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한국전쟁

■ 4월 민중항쟁과 군사정권등장

■ 군사파쇼체제와 민중운동의 성장

본문내용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은 농업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공업의 저임금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곡가정책을 실시하였으며, 그로 인해 농촌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1970년대에 들어 그동안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각계 각층 민중의 대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70년대 노동운동은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노동자들은 신규노조 결성투쟁, 기존 노조의 민주화투쟁을 통해 자주적 성격의 노동조합을 조직하였다.
노동농민운동의 성장과 함께 1970년대 운동의 특징은 사회운동이 각계 각층으로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점이다. 운동의 확산과정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학생운동이었다. 각계 각층으로 확산된 사회운동은 반독재민주화라는 통일적인 투쟁목표하에 공동전선을 형성하였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회의' 등은 명망있는 지도적 인사로 구성된 반독재 연합전선이었다. 이같은 반독재연합전선의 결성과 투쟁은 민중의 생종권투쟁과 결합하면서 유신독재를 위협했다.
유신정권은 반공반북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반독재공동투쟁을 ‘북한의 시중에 의한 것’이라고 매도하면서 철저히 탄압하였다.
1970년대 말 유신체제의 정치경제적 위기는 더욱 심각해져서 군대와 경찰을 동원한 긴급조치로도 체제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유신체제 위기의 징후는 1978년 국회의원선거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신정권은 정치경제적 위기를 탄압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1979년 회사의 폐업조치에 항의하여 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이 경찰에 의해 강제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농성중이던 여성 농동자 김경숙이 목숨을 잃었고, 투쟁을 지원하던 민주인사들이 구속되었다. 박정희정권은 이에 그치지 않고 야당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는 폭거를 자행하였다. 항쟁은 우연적인 군중시위가 아니라 점차 조직적인 봉기의 형태로 발전되었다.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계엄을 선포하였다. 지방에 한정해서 계엄이 선포된 것은 이것이 최초였는데, 이는 부산지역의 항쟁이 얼마나 격렬하였는지를 말해준다.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항쟁은 마산지역으로 확대되어 공화당사 파괴, 경찰서 방화 등 더욱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1979년 1026사건으로 대중의 지지기반이 없던 박정희정권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러나 유신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이 잔존해있었기 때문에 민주화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민주화의 봄’이라고 불렀던 1980년 초 대중은 군사독재의 연장을 허용하지 않았고, 민주화열기가 대중적으로 분출하자 신군부세력은 5월 17일 제2의 쿠데타인 ‘517비상계엄 확대조치’를 감행했다. 517쿠데타를 통해서 신군부는 주요 정치인을 체포구금하는 한편,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였다.
‘517비상계엄 확대조치’에 반대하는 투쟁은 5월 18일 전남대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광주지역에서 전개되었고, 광주지역 전체로 확산되었다. 도청장악 후 광주는 완전히 시민에 의해서 통제되었고 시민의 자발적인 협조에 의해서 질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23일 시민궐기대회에 참가한 시민은 무조건적인 원상복귀가 아니라, 비상계엄 철폐를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투쟁을 계속할 것을 결의하였다. 광주민주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했으나, 군사독재의 재편음모에 정면으로 대항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은 또한 이후 민족민주운동세력에 중요한 투쟁경험과 인식지평의 새로운 확대를 가져다주었다.
전두환정권은 쿠데타로 수립되었기 때문에, 국민적인 지지기반이 매우 취약하였다. 따라서 전두환정권은 출발 직후부터 분명한 대미대일 예속정책을 실행했다. 1981년에 등장한 미국의 레이건정권은 소련에 대한 핵우위정책과 대대적인 군사력 증강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본을 재무장시켜 동북 아시아지역에서 군사동맹체제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경제면에서 전두환정권은 출범 직후 적극적인 개방정책과 중화학투자조정정책을 표명하였다. 중화학투자조정은 전반적으로 부실화된 중화학부문을 재조정하여, 중복과잉투자로 야기된 과당경쟁을 막고 국제경쟁력을 높이고자 한 것이었다. 경제개방정책은 박정희정권 때부터 외채위기가 심각해질 때마다 취해진 정책이었지만, 전두환정권 시기의 개방화는 자본과 상품 양 측면에서 더욱 확대되었다. 대외예속성과 반민주성이 심화되는 가운데 전두환정권은 많은 권력형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1982년 장영자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대규모 권력형 부정비리사건이 계속 이어졌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주춤했던 민중운동은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1983년경 ‘유화국면’을 맞이하면서 점차 회복되었다. 또 선진적 활동가의 주도로 운동이 이념적 조직적인 측면에서 더욱 진전되었으며, 대중화되었다.
개방화정책으로 농민들의 타격이 특히 컸기 때문에 농축산물 수입반대투쟁이 1980년대 전반기 농민운동에서 크게 부각되었다. 1985년에 전개된 농축산물 수입반대 및 소값피해보상투쟁은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이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은 대중적인 반미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반미의식은 1980년 광주미문화원 방화,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 등을 통해서 미국에 광주민중항쟁 진압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6년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의 건국대농성은 학생들의 높은 결의수준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이것의 반성을 통해서 운동의 대중성에 대한 각성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1980년대 학생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렇게 각 부문운동이 활성화되자 각 지역운동과 부문운동을 엮어 하나의 대오를 이루려는 통일전선운동이 본격화되었다. 1984년 결성된 ‘민중 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가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으로 통합되었다. 이 조직은 민중의 생존권투쟁에 대한 지지지원투쟁을 벌였으며, 헌법개정쟁취투쟁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1987년 6월민중항쟁을 주도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1980년대 전반기 대중운동은 1970년대 민중운동을 계승하면서,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을 통해 자주민주통일을 추구하는 민족민주운동으로 성장해나갔다.

키워드

한국,   역사,   현대,   사회,   자주,   민족,   국가,   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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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4.02
  • 저작시기2005.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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