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발해의 건국
2. 발해의 발전과 대외관계
3. 발해의 정치와 사회
4. 발해의 문화
5. 발해의 멸망
Ⅲ. 결론
Ⅱ. 본론
1. 발해의 건국
2. 발해의 발전과 대외관계
3. 발해의 정치와 사회
4. 발해의 문화
5. 발해의 멸망
Ⅲ. 결론
본문내용
상당히 발전하고 국가 행정기구의 규모가 커졌으며 군대수와 그 조직체계도 확대된 것 등으로 하여 국력이 상당히 강화됨으로써 이웃 여러 나라들로부터 '해동성국'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는 많은 내부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 모순들이 10세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첨예화되어 갔다.
) 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 편, 『발해사』 (한마당, 1989), p. 107
내부모순의 격화는 국가의 쇠퇴를 초래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통치지배들은 경제가 발전하고 생산이 장성하는데 따라 각종 형태의 봉건적 착취를 더욱 강화하고 농민, 수공업자, 상인 및 기타 백성들의 생활을 더욱 파탄시켰다. 또한 국가 행정기구의 확대와 군대수의 증가를 빙자하여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농민생활은 파탄에 이르렀고, 농민들이 대량적으로 유랑 도망하는 현상이 점차 막을 수 없는 하나의 흐름으로 되어 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10세기초 발해의 서쪽에 이웃해 있던 거란이 급속히 강화되면서 대외침략에 적극 나서게 된 것이 문제였다. 이미 부패하여 발해는 서쪽에서 진출해오는 거란에 공동으로 대응할만한 마땅한 세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발해는 혼자 힘으로 거란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란은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한편으로는 주변 세력들에 대한 대규모 정복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복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중원지방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원은 쉽게 점령될 곳이 아니었다. 총력을 다하여 공격하여야 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배후세력을 제거해야만 했으니, 결국 중원을 치기 위해서는 동쪽의 발해를 먼저 제거해야 되었고, 또 이를 위해 서쪽 세력을 먼저 공략해야만 했다.
이에 발해는 시시각각으로 압박해오는 거란에 정면으로 대결하거나 아니면 유화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911년경에 신라 등의 나라와 비밀리에 연계를 맺었는가 하면, 918년 2월에는 발해 스스로가 거란에 사신을 보내면서 화친을 구하였다.
) 宋基豪, 『渤海政治史硏究』 (일조각, 1995), pp. 212-219 참조
그러나 거란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단 한 차례가 되어 일시적인 조치로 끝나 버리고 결국 내부의 모순과 거란의 압박으로 926년 발해는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Ⅲ 결 론
발해사는 다른 어느 한국사 분야보다도 국제적인 연구 대상이 되어 있다. 남·북한은 물론이고 중국, 일본, 러시아에서도 연구가 활발하다. 오히려 국내보다 외국의 연구가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주로 자기 역사와의 관련 속에서 다룸으로 인해, 발해사 자체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필자 역시 너무나 부족함을 느끼지만 나름대로 발해사를 공부해 보았다.
발해는 신라의 삼국통일후 30년만에 이룩된 국가였다. 많은 상황과 자료가 이는 고구려의 계승임을 증명하고 있고, 무왕과 문왕에 의해 대외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본고에서는 이런 문제로 발해의 성립과정과 주된 종족의 열거를 들었으며, 발해의 정치와 사회, 그리고 문화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발해의 문화는 무왕때 이르러 당의 적극적인 문화 수용으로 당의 체제를 따른 것이 보이지만 그 실체는 고구려의 계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발해의 멸망에 이르러서는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다. 고구려 이후 강대한 지역을 점령하던 호랑이 발해는 내부적인 모순과 거란의 침입으로 허무하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발해사는 여러 가지로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다.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이 발해의 위상 문제이다. 중국에서는 발해가 독립국가가 아닌 당나라의 지방국가에 불과하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발해인들이 빈공과에 응시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주장은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빈공과란 외국인을 위해서 특별히 설치된 것이기 때문이다. 발해는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당나라에 조공을 보냈으므로, 기본적으로는 당나라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던 왕국이었다. 그러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의 면모를 원용하였던 사실이 부분적으로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중체제는 다음 시기의 고려보다는 미숙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같은 시기의 통일신라나 앞 시기의 고구려보다는 더 적극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발해 역사의 고려에의 계승성을 어느 정도 더듬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발해사의 성격과 귀속 문제이다. 고고학 자료에서는 발해 문화가 여러 요소로 융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발해사의 전개 과정과 연결된 문헌 자료에서는 지속적으로 고구려 계승의식만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고고학 자료가 발해인들의 생활문화와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는데에 비해서, 문헌 자료는 주로 그들의 의식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건국 집단의 구성이나 지배 집단의 구성에서 살펴보았듯이 발해는 고구려 계통의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에서 발해사의 고구려 계승은 자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도 발해사가 한국사에서 온당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발해사의 고구려 계승성과 고려에의 계승성, 발해와 각국 주변국들의 대외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본고는 너무나 미약한 일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 많은 현자들이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하여 다른 방면으로도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탐구를 지속적으로 이루어 발해사의 실체와 역사적 성격이 더욱 더 객관적으로 분명히 드러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盧泰敦, 「高句麗 遺民史硏究」,『한우근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지식산업사, 1981)
박시형, 『발해사』 (이론과실천, 1989)
방학봉, 『발해문화연구』 (이론과실천, 1991)
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 편, 『발해사』 (한마당, 1989)
서병국, 『발해 발해인』 (一念, 1990)
宋基豪, 『渤海政治史硏究』 (一潮閣, 1995)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2004)
車玉信, 「渤海 佛像에 관한 연구」,『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이화여대, 1991)
韓圭哲, 『渤海의 對外關係史』 (신서원, 1994)
현명호, 「발해의 '계루군왕' 칭호에 대하여,『역사과학』(역사과학, 1991)
그러나 발해는 많은 내부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 모순들이 10세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첨예화되어 갔다.
) 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 편, 『발해사』 (한마당, 1989), p. 107
내부모순의 격화는 국가의 쇠퇴를 초래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통치지배들은 경제가 발전하고 생산이 장성하는데 따라 각종 형태의 봉건적 착취를 더욱 강화하고 농민, 수공업자, 상인 및 기타 백성들의 생활을 더욱 파탄시켰다. 또한 국가 행정기구의 확대와 군대수의 증가를 빙자하여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농민생활은 파탄에 이르렀고, 농민들이 대량적으로 유랑 도망하는 현상이 점차 막을 수 없는 하나의 흐름으로 되어 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10세기초 발해의 서쪽에 이웃해 있던 거란이 급속히 강화되면서 대외침략에 적극 나서게 된 것이 문제였다. 이미 부패하여 발해는 서쪽에서 진출해오는 거란에 공동으로 대응할만한 마땅한 세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발해는 혼자 힘으로 거란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란은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한편으로는 주변 세력들에 대한 대규모 정복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복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중원지방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원은 쉽게 점령될 곳이 아니었다. 총력을 다하여 공격하여야 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배후세력을 제거해야만 했으니, 결국 중원을 치기 위해서는 동쪽의 발해를 먼저 제거해야 되었고, 또 이를 위해 서쪽 세력을 먼저 공략해야만 했다.
이에 발해는 시시각각으로 압박해오는 거란에 정면으로 대결하거나 아니면 유화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911년경에 신라 등의 나라와 비밀리에 연계를 맺었는가 하면, 918년 2월에는 발해 스스로가 거란에 사신을 보내면서 화친을 구하였다.
) 宋基豪, 『渤海政治史硏究』 (일조각, 1995), pp. 212-219 참조
그러나 거란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단 한 차례가 되어 일시적인 조치로 끝나 버리고 결국 내부의 모순과 거란의 압박으로 926년 발해는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Ⅲ 결 론
발해사는 다른 어느 한국사 분야보다도 국제적인 연구 대상이 되어 있다. 남·북한은 물론이고 중국, 일본, 러시아에서도 연구가 활발하다. 오히려 국내보다 외국의 연구가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주로 자기 역사와의 관련 속에서 다룸으로 인해, 발해사 자체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필자 역시 너무나 부족함을 느끼지만 나름대로 발해사를 공부해 보았다.
발해는 신라의 삼국통일후 30년만에 이룩된 국가였다. 많은 상황과 자료가 이는 고구려의 계승임을 증명하고 있고, 무왕과 문왕에 의해 대외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본고에서는 이런 문제로 발해의 성립과정과 주된 종족의 열거를 들었으며, 발해의 정치와 사회, 그리고 문화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발해의 문화는 무왕때 이르러 당의 적극적인 문화 수용으로 당의 체제를 따른 것이 보이지만 그 실체는 고구려의 계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발해의 멸망에 이르러서는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다. 고구려 이후 강대한 지역을 점령하던 호랑이 발해는 내부적인 모순과 거란의 침입으로 허무하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발해사는 여러 가지로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다.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이 발해의 위상 문제이다. 중국에서는 발해가 독립국가가 아닌 당나라의 지방국가에 불과하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발해인들이 빈공과에 응시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주장은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빈공과란 외국인을 위해서 특별히 설치된 것이기 때문이다. 발해는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당나라에 조공을 보냈으므로, 기본적으로는 당나라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던 왕국이었다. 그러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의 면모를 원용하였던 사실이 부분적으로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중체제는 다음 시기의 고려보다는 미숙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같은 시기의 통일신라나 앞 시기의 고구려보다는 더 적극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발해 역사의 고려에의 계승성을 어느 정도 더듬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발해사의 성격과 귀속 문제이다. 고고학 자료에서는 발해 문화가 여러 요소로 융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발해사의 전개 과정과 연결된 문헌 자료에서는 지속적으로 고구려 계승의식만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고고학 자료가 발해인들의 생활문화와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는데에 비해서, 문헌 자료는 주로 그들의 의식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건국 집단의 구성이나 지배 집단의 구성에서 살펴보았듯이 발해는 고구려 계통의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에서 발해사의 고구려 계승은 자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도 발해사가 한국사에서 온당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발해사의 고구려 계승성과 고려에의 계승성, 발해와 각국 주변국들의 대외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본고는 너무나 미약한 일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 많은 현자들이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하여 다른 방면으로도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탐구를 지속적으로 이루어 발해사의 실체와 역사적 성격이 더욱 더 객관적으로 분명히 드러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盧泰敦, 「高句麗 遺民史硏究」,『한우근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지식산업사, 1981)
박시형, 『발해사』 (이론과실천, 1989)
방학봉, 『발해문화연구』 (이론과실천, 1991)
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 편, 『발해사』 (한마당,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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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基豪, 『渤海政治史硏究』 (一潮閣, 1995)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2004)
車玉信, 「渤海 佛像에 관한 연구」,『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이화여대, 1991)
韓圭哲, 『渤海의 對外關係史』 (신서원, 1994)
현명호, 「발해의 '계루군왕' 칭호에 대하여,『역사과학』(역사과학,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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