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 러일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조선과 관련시켜서 논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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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일, 러일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조선과 관련시켜서 논하시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청일전쟁
1. 개요
2. 배경
3. 전쟁의 의도와 진행과정
4. 역사적 의의
5. 청일전쟁과 조선의 역사적 의의

Ⅱ. 러일전쟁
1. 개요
2. 배경
3. 러시아의 상황
4. 주요전투와 진행과정
5. 역사적 의의
6. 러일전쟁과 조선의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 다행히 전파 방해에 성공한 러시아 함대는 일단 포격을 모면하였고, 교신 불능상태에 빠진 일본 해군은 공격작전을 거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이후 일본해군은 어뢰정을 이용한 야간의 기습돌격 작전으로 뤼순항의 러시아 함선들에 대한 공격방법 바꿔 전과를 올림
. 한편,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동해의 원산에 있던 일본 해군기지를 기습 공격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출항
. 러시아의 공격을 미리 알아챈 일본은 함정들은 러시아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음
. 한밤중에 일본군 기습으로 시작된 러일 전쟁은, 중국과 러시아의 조차지인 여순 항에 있던 러시아 함대가 공격당하고 요동반도와 조선에 일본군이 상륙 . 뤼순은 러시아의 심장부로부터 9000Km나 떨어져 있어 러시아는 즉각 손을 쓸 수 없었고, 그 해 내내 뤼순의 러시아군은 일본의 봉쇄를 뚫어보려 노력하였지만 불가능
. 러시아의 해군기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전투함대가 출항하였으나 봉쇄를 밀어내지는 못하였고, 잦은 일본 해군과의 교전에서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대부분의 전함을 상실
. 블라디보스톡 부대는 뤼순항에 고립된 러시아 극동함대의 구출을 위해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던 중,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에 의해 울산 근해에서 포착되어 해전에 돌입하게 되는데, 이 울산 앞바다의 해전에서 심대한 타격을 입고 패퇴
- 육상에서의 전황
. 일본의 작전계획은 러시아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러시아 극동군(육해군 포함)을 "신속하고도 결정적인승리"-로 섬멸한다는 것
. 제정 러시아의 총병력은 일본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지만, 극동주둔군은 13만 5000명에 불과
. 러시아의 극동 주둔군은 무려 9000Km나 떨어진 곳에서 아직 완성되지도 못한 시베리아횡단 철도를 통하여 보급물자와 증원군을 보충
. 일본은 총병력 85만, 15만명은 즉각 동원이 가능한 부대
. 2월 10일의 개전 이후 다음날인 11일 대본영을 설치한 일본은 13개 사단의 주력군을 기반으로 최우선 작전목표로 요동반도와 요양, 그리고 봉천을 점령하는 것
. 일본 육군의 제 1군은 조선국경을 넘어 안동, 봉성(鳳城)으로 진격하고 제 2군은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대련과 요양방면으로 진격하고 제 3군은 장가둔(張家屯)에 상륙하여 뤼순을 목표로 공략
. 제 1군의 공략목표인 요양은 9월4일에 점령되고, 제 2군의 대련은 5월27에 함락되었으나 제 3군의 공략지인 뤼순은 러시아군의 조직적인방어로 인해 간신히 버티고 있었음
. 일본 육군의 만주파견군은 제1군,2군,4군의 합동작전으로 어렵게 승리를 하고 , 노기 마레스케 장군 휘하의 제 3군이 뤼순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905년 1월까지 무려 8개월간의 소모전 끝에 어렵사리 뤼순을 함락
. 세 차례에 걸친 돌격전 끝에 뤼순항을 내려다보는 203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일본군은 집중포격과 보병돌격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제 3군의 총병력 6만7000명의 장병 중 1만7000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어렵게 이 고지를 점령
. 이 고지의 점령으로 1905년 1월 1일 러시아 극동군 사령관인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스토셀장군은 일본군에게 항복
. 일본은 대 육군국인 제정 러시아의 육군을 상대로 러일전쟁의 승패의 분수령이 된 봉천 대회전에서도 오오야마 만주파견군 사령관 휘하의 일본군은 러시아군 30만과 일본육군 25만명이 보름간의 사투 끝에 7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긴 했으나, 러시아군의 주력을 섬멸시키는 대타격을 입히고 이후 전황은 급격히 일본군에 기울 게 됨
. 러시아 해군의 규모는 당시 일본함대의 3배의 규모에 달하였으나, 발트 함대와 극동 함대 그리고 흑해함대로 분산 배치되어 있었음
. 뤼순 요새가 아직 봉쇄중인 1904년 10월, 러시아의 수뇌부는 러시아 함대의 실질적인 주력부대인 발틱 함대를 극동으로 파견하여 일본 연합 함대를 격파한 다음 태평양의 재해권을 확보한 후, 만주에 대한 일본의 보급선을 차단한후 육군의 주력을 투입하여 만주의 일본군을 쓸어버린다는 매우 야심찬 계획 수립
5. 역사적 의의
- 러일전쟁은 동아시아에서 식민지분할을 위한 열강간의 세력각축의 결과
- 한국 및 만주를 둘러싼 양제국주의 국가의 무력충돌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배후에는 영국·미국의 자본이, 러시아의 배경에는 프랑스의
자본이 각각 지원한 제국주의 전쟁
- 이 전쟁을 계기로 한국은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 내지 묵인하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
6. 러일전쟁과 조선의 역사적 의의
- 러·일전쟁은 근대화 노력에 힘을 기울이고 있던 대한제국에 큰 타격을 가함
- 러·일 간에 전운이 짙어지자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局外中立) 선언
-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2월 8일 인천과 여순에서 러시아를 공격한 후 2월 9일 서울에 군대를 진주시킴
- 일본군은 3월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으로 재편됐고, 사령관의 계급도 소장에서 9월 대장으로 승격되었고 2월 11일 파블로프 주한러시아공사는 서둘러 서울을 떠남
- 하야시(林 權助) 주한일본공사는 조선 정부에 동맹 조약을 강요하여,
2월 23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
- 내용은 ▲한국은 일본에게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 ▲한국과 일본은 상호 간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서는 협정의 취지에 위배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말것 등을 규정
- 3월 17일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이 특사로 서울에 도착, 한일의정서의 이행을 강요
- 일본은 4월 1일 조선의 통신망을 접수했으며 병력과 군수물자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선 철도의 부설을 서둘렀음
- 5월 18일 한국이 러시아와 맺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이권을 폐기하도록 강요
- 1904년 8월 22일 양국 간에 제1차 한일협약 체결
-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인 재정고문과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외교고문을 두고, 외국과의 조약 체결 때 일본 정부와 협의하도록 하는 이 조약은 재정과 외교의 실권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을 의미
- 일본은 군사·경찰·교육·왕실 업무 등에도 조약에 없는 고문을 초청 형식으로 두게 함으로써 이른바 ‘고문(顧問)정치’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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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4.06
  • 저작시기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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