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역사]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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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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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1. 18세기 계몽주의의 발전 : 비판적 사고의 전개
1) 문화적 동향의 변화
2) 계몽주의의 사유-종교, 과학, 국가, 사회
가. 종교적 사유 - 세속화와 이신론
나. 인간과학의 성립
다. 계몽주의적인 개혁 프로그램
2. 구체제의 현실과 계몽주의의 전망
1) 절대왕정의 문예정책
2) 자본주의적인 문필사업의 전개
3) 고급의 계몽주의와 저급의 계몽주의
4) 작가의 권리
5) 이념의 유포와 확산 : 서적 판매와 독서 양태
6) 절대주의와 자본주의
7) 계몽주의와 여성
3. 계몽주의의 위기와 붕괴 : 낭만주의의 등장
4. 계몽사상과 프랑스혁명

본문내용

같은 서적의 독서 대중을 이루는 사람들도 상인과 실업가 집단이라기보다는 행정, 사법 분야에 종사하는 엘리트들이었다. 이는 기존 체제의 가치관이 그와 양립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와 병행하고 또한 잠식되어가는 동시에 그것을 포섭해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백과전서』의 이데올로기는 체제에 진정한 위협이 되지 않았으며, 그러기에 정부 역시 그 출판과 판매를 묵인했다고도 볼 수 있다. 게다가 계몽사상가의 마지막 세대는 궁정과 아카데미, 그리고 고위층으로부터 연금 등의 후원을 받으면서 구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힘썼다. 이런 맥락에서 프랑스 혁명이 계몽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계몽주의가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즉 다수의 혁명가들이 절대주의체제를 공격하고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계몽사상가들의 사유를 필요에 따라서 선택하고 또한 자신의 의도에 따라 변용시키기도 하면서 이른바 "계몽주의"라는 개념을 형성해나갔다는 것이다.
실제로 앞에서 말한 계몽 사상가들, 즉 몽테스키외, 루소, 볼테르 등은 그들의 저술을 통하여 프랑스혁명기 혁명가들의 사유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혁명가들은 국왕과 국민 사이의 중간적 매개체로서의 대의적인 기구 수립을 위한 이론으로서 몽테스키외의 사유를 받아들였고, 볼테르를 통하여 군주제적인 개혁을 모색하기도 했다. 또한 루소의 인민주권론으로부터 민주주의의 원리를 끌어내기도 했다. 특히 자코뱅 정권의 시기에 상퀼로트의 직접민주주의적인 정치활동을 통하여 어느 정도의 실험이 이루어졌다 할 수 있다. 이 시도는 비록 좌절되고 말았지만, 그 후 서양의 정치적인 사유에 민주주의라는 흐름을 제공한다.
이처럼 혁명지도자들은 계몽주의 사상의 한 면 혹은 다른 면을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혁명이 계몽주의를 실현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혁명 자체의 내부에는 계몽주의에서 표현되는 것과는 다른 정신경향과 이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과 관련되는 몇 가지 계몽주의적인 요소를 지적해 볼 수 있다. 우선 평등의 이념이다. 평등에는 세 가지 개념 정도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법 앞에서 평등이다. 이 개념은 1789년 10월 26일에 제정된 <인간과 시민을 위한 권리선언>에 명기되어 있다. 법의 조항들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법의 내용 자체가 이미 차별적으로 제정되어있을 가능성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자면 프랑스 혁명은 투표를 통한 정치적인 평등의 개념, 즉 평등한 참정권의 개념조차 구현시키지 못했다. 직접민주주의를 희구했던 상뀔로트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보통선거는 여전히 실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단지 의미가 있다면 앞서 언급한대로 상징적으로나마‘법적 평등’의 개념이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정치적인 평등의 조건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사회, 경제적 평등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재산에 관한 문제와 결부시켜 볼 수 있다. 프랑스혁명 이후에 사회ㆍ경제적 불평등이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우선 앞서 언급한 <인권선언>은 재산의 신성불가침성의 이념을 천명하고 있다. 혁명은 물론 귀족과 교회의 자산 등 토지 면적의 15% 정도를 재분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토지면적을 중심으로 해서 볼 때 이 때 주로 수혜를 누렸던 것은 부르주아 집단이었음을 생각하면, 프랑스혁명으로 성취된 사회ㆍ경제적 평등이 지극히 불완전한 것이었음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재산권에 대한 계몽 사상가들의 입장이 각기 달랐던 것도 상기해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민중들이 개입하기도 했던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의 원초적인 개념이 제시되었으며, 이를 혁명에 앞섰던 계몽주의의 사유와 무관한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 역시 타당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의 개념이다. 여기에도 인신 상의 자유, 사회활동의 자유 및 경제활동의 자유 등이 내포된다. 전반적으로 혁명은 제반 자유의 권리를 확립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주목할 것이 프랑스혁명으로 보다 자유로운 경제활동의 가능성이 보장되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계몽주의는 절대주의체제의 위기를 현실적 배경으로 하여 서양 문명사에 존재했던 모든 가치와 신조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새로운 기반을 확립하려 했던 모색이었다. 비록 그 현실화에는 문제가 많았다. 되풀이 말하거니와 새로이 등장한 독자층이 계몽주의를 급진전시키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지방의 독서층은 문맹의 하층 민중과 마찬가지로 계몽주의로부터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독서시장을 확대하여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출판사업의 확대를 다시 한 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겠다. 18세기 문화영역은 지속적으로 성장해온 자본주의적인 시민사회가 절대주의 내지 중상주의 국가와 거래 혹은 교류하는 방식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문인들과 그 독자들이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이거나 혹은 혁명적인 기업가 집단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부르주아로서의 성격과 태도를 보유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지나친 강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계몽주의의 의의는 인간중심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사유라는 성과를 종합해냈으며, 그것을 어느 정도 대중적으로 확산시켰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혁명기 공포정기의 시련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규제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의 신조에 회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계몽주의 사유의 특징이었던 낙관론은 인간의 오랜 유산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이 속에서 역사의식이 성장했다. 인간역사는 일반적인 진보의 기록이라는 계몽주의적 역사관이 산출된 것이다. 계몽주의는 프랑스 혁명과 함께 끊임없는 변화의 시기를 맞이한 서양정신에 그 전개와 발전을 위한 다양한 문제제기와 함께 답변을 찾기 위한 이론적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사고를 촉구한 셈이다. '자유, 평등, 우애'로 요약되는 프랑스혁명의 이념은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했으며, 또한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에게 어떻게 하면 자유를 상실함이 없이 평등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 하는 과제를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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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4.12
  • 저작시기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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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92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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