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들어가는 글
I. 서술상황에 따른 서술의 중개성
II. 소설 속의 소설론
III.'눈' 위에서의 꿈과 휴머니즘의 문제
맺는말
I. 서술상황에 따른 서술의 중개성
II. 소설 속의 소설론
III.'눈' 위에서의 꿈과 휴머니즘의 문제
맺는말
본문내용
대, 가도 들길, 진훑탕이 되어버린 밭으로 일제히 돌진하여 나와, 길가에 멈추어 서있는 그림자인 우리들은 그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다. 숲 가장자리로 나가자, [...] (III,992쪽)
저기에 우리들의 친구가 있다 저기에 한스 카스토르프가 있다! 그가 이류 러시아인 석에 있을 때부터 길렀던 작은 턱수염으로, 우리들은 아주 멀리에서도 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보라, 그는 쓰러져 있는 전우의 손을 밟는다. [...] 그런데 웬일일까. 그가 노래를 부른다! [...] (III,992f.)
아, 우리들은 그림자의 안전한 장소에서 보고있는 것이 부끄럽다! 퇴장하자!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두자! 우리들의 친구, 저 한스 카스토르프는 당했을까? 그는 순간 당했다고 생각했다. 큰 흙덩이가 정강이에 부딪쳐 아팠지만 괜찮았다. 일어서서 진흙이 무겁게 붙은 구두를 절절 끌고 절름거리면서, 다시금 비틀비틀 전진을 계속하며 무의식 중에 흥얼거렸다.
가지는 흔들려서 말한 것 같이 ...
이리하여 그는 혼란 속으로, 비속으로, 어스름 속으로 우리들의 눈에서 사라져갔다.
안녕, 한스 카스토르프, 인생의 성실한 걱정거리 녀석! 자네 이야기는 끝마쳤다.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이야기, 연금술적인 이야기였다. 우리들은 이야기 그 자체가 목적이었기에 이야기한 것이지, 자네를 위해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자네는 단순한 젊은이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은 결국 자네의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가 자네에게 일어난 것을 보면 자네도 보기와는 달리 보통내기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우리들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네에게 다분히 교육자다운 애정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애정 때문에 앞으로 자네를 볼 수도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으리라 생각하니, 우리들은 손가락 끝으로 살그머니 눈시울을 누르고 싶어진다.
안녕 ... 자네가 살아있든, 또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머무르든 간에 이것으로 작별이다. 전도가 결코 밝지는 않다. 자네가 말려들어간 사악한 무도는 아직도 여러 해 동안 그 죄많은 춤을 계속할 것이다. 자네가 거기거 무사히 돌라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그 의문은 의문으로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하고 있는 것이다. 자네가 겼은 육체와 정신의 모험은 자네의 단순성을 높혀서, 자네가 육체에 있어서는 아마도 이처럼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을 정신의 세계에서 오래 살게 해주었던 것이다. 자네는 '술래잡기'에 의해 죽음과 육체의 방종 속에서 예감으로 충만되어 사랑의 꿈이 탄생하는 순간을 체험했다. (III,993f.)
여기에서 독자는 카스토르프의 이야기 자체와는 다른 서술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마지막 진술들을 내뱉는 서술자가 존재위치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바로 지척이다. 그러나 그는 카스토르프와 동일한 지점에 있지는 않다. 바로 이 지척의 거리가 카스토르프의 진정한 '해방'을 기대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서술자는 '길가에 겁을 먹고 서있는', '아무 위험이 없는 그림자'로서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고 있다. 서술자가 여기서 스스로 무력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은, 주인공 카스토르프가 열광한 이 '죽음의 무도'를 그가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는 서술적 의도를 드러낸다. 그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 위험이 없는 그림자'인 자신인가? 아니면 '죽음의 무도' 자체인가? 그로 하여금 '큰 소리와 허풍을 떨'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림자'로서의 그의 존재가 아니라, 건강한 시민적 정서를 지닌 그의 전쟁에 대한 수치심와 자괴감이다. '숲 가장자리'에 나가서서 '저기에서'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한스 카스토르프를 바라보며 그는 '부끄럽다! 퇴장하자!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두자!'고 외치고 있다. 그는 카스토르프가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이야기의 막을 내리려하고 있으며, 카스토르프가 정말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카스토르프가 죽음에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죽음과의 공감'에 더욱 깊숙히 침윤되는 동안 서술자는 죽음의 세계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현실 속의 카스토르프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을 희망을, 즉 '눈' 위에서 체험된 이상의 실현을, 독자에게 던진다.
이 세계를 덮는 죽음의 향연 속에서, 비내리는 밤하늘을 태우고 있는 저 끔찍한 열병과 같은 업화(業火) 속에서, 그러한 것들 속에서도 언젠가는 사랑이 탄생할 것인가? (III,994)
여기서 서술자의 인물과의 존재영역의 차별성으로 인해 이미 '발푸르기스의 밤 Walpurgisnacht'에 찾아들고 전쟁 속에서 적나라하게 현현된 '의지 Wille'의 세계, 무(無)의 세계는 그러한 세계를 뛰어넘는 '사랑'에 대한 한 가닥의 소망이 된다. 인물의 목소리와 다른 또하나의 소리는 독자의 욕망이 텍스트와 충돌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지 못하는 작가의 서술적 전략이다. 그렇다면 독자는 소설 속에서 다시금 이상적인 '휴머니즘'의 이념을 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주석적 서술자만이 이끌어낼 수 있는 사고이다.)
맺는말
위에서 서술형식이 독자의 이해에 실제로 작용하는 바를 생각해보고자 하였다. 위에 인용한 '눈' 단원의 문장에서와 같이 서술의 중개성이 낮은 인물시점의 서술상황에서 사실상 독자는 인물매체라는 또다른 중개자를 만나게 되고만다. 그러나 그러한 인물매체는 결코 독자에게 규범적 윤리와 사고의 통일성을 지양하는 중립적 사고를 강요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독자는 서술체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공간을 부여받는다. 반면 소설의 종말 부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주석적 서술상황에서 서술자는, 허구적 인물과 실제 독자 사회의 윤리적 규범 간의 중재를 담당하며 '일종의 중립화된 서술'
) F. K. Stanzel: Typische Formen des Romans, S.22.
을 행한다. 여기에서 독자는 이야기자체와 서술자 간의 유희적 긴장에 유의해야 하지만, 또한편 자신을 조종하며 위력을 발산하고자 하는 서술자 자체에 대한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된다. 『마의 산』에서 그러한 서술자는 하나의 이상적인 휴머니즘을 꿈꾸도록 독자를 조종하는 서술적 장치가 된다.
저기에 우리들의 친구가 있다 저기에 한스 카스토르프가 있다! 그가 이류 러시아인 석에 있을 때부터 길렀던 작은 턱수염으로, 우리들은 아주 멀리에서도 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보라, 그는 쓰러져 있는 전우의 손을 밟는다. [...] 그런데 웬일일까. 그가 노래를 부른다! [...] (III,992f.)
아, 우리들은 그림자의 안전한 장소에서 보고있는 것이 부끄럽다! 퇴장하자!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두자! 우리들의 친구, 저 한스 카스토르프는 당했을까? 그는 순간 당했다고 생각했다. 큰 흙덩이가 정강이에 부딪쳐 아팠지만 괜찮았다. 일어서서 진흙이 무겁게 붙은 구두를 절절 끌고 절름거리면서, 다시금 비틀비틀 전진을 계속하며 무의식 중에 흥얼거렸다.
가지는 흔들려서 말한 것 같이 ...
이리하여 그는 혼란 속으로, 비속으로, 어스름 속으로 우리들의 눈에서 사라져갔다.
안녕, 한스 카스토르프, 인생의 성실한 걱정거리 녀석! 자네 이야기는 끝마쳤다.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이야기, 연금술적인 이야기였다. 우리들은 이야기 그 자체가 목적이었기에 이야기한 것이지, 자네를 위해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자네는 단순한 젊은이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은 결국 자네의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가 자네에게 일어난 것을 보면 자네도 보기와는 달리 보통내기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우리들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네에게 다분히 교육자다운 애정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애정 때문에 앞으로 자네를 볼 수도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으리라 생각하니, 우리들은 손가락 끝으로 살그머니 눈시울을 누르고 싶어진다.
안녕 ... 자네가 살아있든, 또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머무르든 간에 이것으로 작별이다. 전도가 결코 밝지는 않다. 자네가 말려들어간 사악한 무도는 아직도 여러 해 동안 그 죄많은 춤을 계속할 것이다. 자네가 거기거 무사히 돌라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그 의문은 의문으로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하고 있는 것이다. 자네가 겼은 육체와 정신의 모험은 자네의 단순성을 높혀서, 자네가 육체에 있어서는 아마도 이처럼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을 정신의 세계에서 오래 살게 해주었던 것이다. 자네는 '술래잡기'에 의해 죽음과 육체의 방종 속에서 예감으로 충만되어 사랑의 꿈이 탄생하는 순간을 체험했다. (III,993f.)
여기에서 독자는 카스토르프의 이야기 자체와는 다른 서술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마지막 진술들을 내뱉는 서술자가 존재위치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바로 지척이다. 그러나 그는 카스토르프와 동일한 지점에 있지는 않다. 바로 이 지척의 거리가 카스토르프의 진정한 '해방'을 기대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서술자는 '길가에 겁을 먹고 서있는', '아무 위험이 없는 그림자'로서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고 있다. 서술자가 여기서 스스로 무력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은, 주인공 카스토르프가 열광한 이 '죽음의 무도'를 그가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는 서술적 의도를 드러낸다. 그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 위험이 없는 그림자'인 자신인가? 아니면 '죽음의 무도' 자체인가? 그로 하여금 '큰 소리와 허풍을 떨'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림자'로서의 그의 존재가 아니라, 건강한 시민적 정서를 지닌 그의 전쟁에 대한 수치심와 자괴감이다. '숲 가장자리'에 나가서서 '저기에서'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한스 카스토르프를 바라보며 그는 '부끄럽다! 퇴장하자!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두자!'고 외치고 있다. 그는 카스토르프가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이야기의 막을 내리려하고 있으며, 카스토르프가 정말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카스토르프가 죽음에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죽음과의 공감'에 더욱 깊숙히 침윤되는 동안 서술자는 죽음의 세계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현실 속의 카스토르프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을 희망을, 즉 '눈' 위에서 체험된 이상의 실현을, 독자에게 던진다.
이 세계를 덮는 죽음의 향연 속에서, 비내리는 밤하늘을 태우고 있는 저 끔찍한 열병과 같은 업화(業火) 속에서, 그러한 것들 속에서도 언젠가는 사랑이 탄생할 것인가? (III,994)
여기서 서술자의 인물과의 존재영역의 차별성으로 인해 이미 '발푸르기스의 밤 Walpurgisnacht'에 찾아들고 전쟁 속에서 적나라하게 현현된 '의지 Wille'의 세계, 무(無)의 세계는 그러한 세계를 뛰어넘는 '사랑'에 대한 한 가닥의 소망이 된다. 인물의 목소리와 다른 또하나의 소리는 독자의 욕망이 텍스트와 충돌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지 못하는 작가의 서술적 전략이다. 그렇다면 독자는 소설 속에서 다시금 이상적인 '휴머니즘'의 이념을 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주석적 서술자만이 이끌어낼 수 있는 사고이다.)
맺는말
위에서 서술형식이 독자의 이해에 실제로 작용하는 바를 생각해보고자 하였다. 위에 인용한 '눈' 단원의 문장에서와 같이 서술의 중개성이 낮은 인물시점의 서술상황에서 사실상 독자는 인물매체라는 또다른 중개자를 만나게 되고만다. 그러나 그러한 인물매체는 결코 독자에게 규범적 윤리와 사고의 통일성을 지양하는 중립적 사고를 강요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독자는 서술체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공간을 부여받는다. 반면 소설의 종말 부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주석적 서술상황에서 서술자는, 허구적 인물과 실제 독자 사회의 윤리적 규범 간의 중재를 담당하며 '일종의 중립화된 서술'
) F. K. Stanzel: Typische Formen des Romans, S.22.
을 행한다. 여기에서 독자는 이야기자체와 서술자 간의 유희적 긴장에 유의해야 하지만, 또한편 자신을 조종하며 위력을 발산하고자 하는 서술자 자체에 대한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된다. 『마의 산』에서 그러한 서술자는 하나의 이상적인 휴머니즘을 꿈꾸도록 독자를 조종하는 서술적 장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