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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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의 교육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주제선정이유

2. 조선시대 교육의 형태

3. 조선의 성균관의 역사

4. 성균관
1) 문묘(文廟)와 유교이념
2) 성균관의 교육
3) 성균관의 학관
4) 성균관 유생의 생활과 활동
5) 성균관의 경제적 기반

5. 서 원

6.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서원의 간단 비교
*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의 교육(참고) *

7. 결 론

본문내용

도리어 정상적인 학문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4) 개화기
새로운 제도 및 기술을 도입하여 근대문화를 이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근대식 학교교육이 나타나게 되었다. 1886년 정부가 미국인 교사 3명을 초빙하여 세운 육영공원(育英公院)과 미국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培材學堂)이화학당(梨花學堂)이 한국 최초의 근대식 학교였다. 국가가 제도로써 구교육을 청산하고 현대식 교육을 맞아들인 것은 갑오개혁 이듬해인 1895년의 일이었다. 이 해에 관립 한성사범학교외국어학교 등이 설립되었으며, 상공학교법관양성소광무학교육군유년학당전무학당 등 실업계통 학교도 세워졌다.
그러나 1905년 일본과의 을사조약 체결로 교육의 주도권은 일본으로 넘어갔고 교육관계 법령도 그들에 의해 개정 또는 제정되었다. 당시의 국가위기 의식은 교육구국사상으로 전개되어 전국적으로 애국지사 또는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사립학교가 많이 나타났다.
5) 일제강점기
1910년 일제에 의한 국권피탈로 한국의 교육은 일본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도구가 되었으며, 일본은 우민정책(愚民政策)을 그들의 식민지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1911년에 공포된 조선교육령은 '시세(時勢)와 민도(民度)에 적합한 교육'을 한다는 구실로 보통학교 4년제, 고등보통학교 4년제(여자는 3년)의 단기 교육제도를 채택하였다. 더욱이 교수용어를 일본어로 하고 한국어 사용을 금하였으며, 노동력의 확보를 위하여 실업교육에 치중하였다.
1922년에 개정된 교육령은 내지준거(內地準據)를 내세워 일본과 같은 초등교육 6년, 중등 5년, 전문학교의 설치 등을 제정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동화정책(同化政策)을 한층 철저화하였던 것이다.
1938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표방하여 제도상으로는 학교명칭에서 교육연한에 이르기까지 일본과 동일하게 되었으나, 이것은 중일전쟁과 소위 그들의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에 징용징병정신대 징발을 행하려는 전초작업이었다. 이처럼 일본은 식민지 지배수단으로서 교육을 적극 이용하였으나, 실제로 그들의 동화작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1945년에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6) 광복 이후
광복 후 한국은 새로운 시대의 지도이념인 민주주의에 입각한 교육을 시작하였다. 군정(軍政) 3년간의 기초 작업을 거쳐서 정부수립 후 1년 만인 1949년 12월 31일에 민주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한 새 교육법이 제정공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교육의 문호가 개방되어 교육의 기회균등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교육의 막대한 양적 증가를 초래하였다.
학제는 비민주적인 복선형 제도에서 민주적인 단선형 제도로 바뀌었고, 군정시 664제와 교육법 제정시의 6434제가 1953년 개정교육법에서는 6334제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49년에 공포된 교육법에 의하여 중앙집권적 행정제도가 지양되고 지방분권적 행정제도가 확립됨으로써 교육자치제도가 수립, 1952년 시군 교육위원이 선출됨으로써 자치제가 구현되기 시작했다. 1961년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에 의하여 그 기능이 일시 중지되었으나, 1964년 초에 불완전한 형태이지만 다시 부분적 자치제가 부활되었고, 1991년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본격적인 교육자치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교육과정 역시 민주적으로 개편되었다. 1954년 4월 문교부령 제35호로서 공포된 '교육과정 시간배당 기준령'의 제정의도는 학생들의 개성차(個性差)를 존중하며 특기활동을 조장하고, 실업교육의 강화와 사회생활과를 중심과정으로 하였으며 민주시민 양성에 주력하였다. 또한, 신교육과정에 부합되는 교과서를 사용하게 하기 위하여 초등학교를 제외하고는 종래의 국정교과서제도가 폐지되고 교과서 검인정제도가 채택되었다.
교육사상면에 있어서는 광복 직후 듀이의 경험주의 교육사상이 도입되어 한국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1960년대부터 점차 국적 있는 교육이라는 표어로 자주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유치원교육의 학제화, 초등학교 교육의 정상화, 의무교육연한의 연장, 고등교육기회의 확대를 위한 방송대학개방대학의 확장실시, 평생교육 체제의 확립확산 등도 실시되었다.
7.결론
이상의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며 생각해 본다면 조선시대의 교육은 한마디로 권력과 연관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주제를 선정하면서 과거의 교육제도 특히 관학중 대학인 성균관에 대해 알아보고 우리나라 현재의 우리가 다니고 있는 대학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하는 시간을 갖고자 하였는데 조사를 하다보니 시대가 바뀌고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이나 현재나 그 폐해는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조선시대 성균관과 사학인 서원에 대해 조금이나마 부족하지만 알게되고 조선시대 그 이전이나 이후 즉, 현재의 상황까지 좁은 소견으로 말해본다면 대학교육의 발달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국립대학인 태학을 두어 경학(經學) 문학 무예를 가르쳤고, 신라는 551년 국립대학인 국학을 설립하여 서경(書經) 교육 외에 천문 의학 등의 직업교육기관도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국자감을 설립하여 신라의 교육과정을 계승하였고 조선시대 성균관은 유교와 관리의 고등교육기관이었다. 한말 및 일제강점기에는 사립으로 세브란스(현 연세대학 의과대학 전신), 보성(현 고려대학 전신), 이화(현 이화여자대학 전신), 연희(현 연세대학 전신),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후에 혜화, 현 동국대학 전신), 숙명(현 숙명여자대학 전신) 등의 고등교육기관이 전문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오늘날 대학은 국민교육제도의 일환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국가적 요구에 맞고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요청 받고 있다. 대학이 추구하는 대학의 자유도 제한 받을 수밖에 없다. 대학의 자유란 하나는 교수의 개인적 연구의 자유이며, 다른 하나는 대학 자체의 제도적 자율성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자료를 참조하여 대학의 사명에 대해 생각해보고 발표를 끝내고자 한다. 대학은
문화의 계승과 창조, 지도자 양성, 사회 봉사 의 사명을 가지고 발전해 가야 한다.
조선시대 역시 그렇고 현재 우리에게도 필요한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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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5.08
  • 저작시기2005.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6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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