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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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무사도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武士道와 武士道의 淵源
2. 武士 계층의 발생
3. 瘡 . 江戶 . 明治時代의 武士道의 特徵

Ⅲ. 결론

본문내용

相續제도를 비롯하여 어가인의 경제적 기반이 약해지는 요인들이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幕府는 經濟的 窮乏으로부터 御家人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고 또한 元이 침략해 왔을 때, 목숨을 걸고 적군을 물리쳐도 은상을 받지 못했던 것 등을 요인으로 막부의 어가인에 대한 통제력이 급격히 약해져 결국 鎌倉幕府는 약 140년 만에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초기 鎌倉武士는 賴朝를 중심으로 순정한 감정에 의해 강인한 충절의 정신을 발휘하여 武勇의 정신에 굉장한 발달을 이루었지만, 恩級에 대한 奉公이라는 당시 武士道의 도식이 뚜렷해졌다. 賴朝 이후의 무사들은 道義上 적지 않은 결함을 노출하게 된다. 그러나 주인에 대한 충절과 무용의 정신으로 전쟁에서 봉공의 의무를 다하며 검소함을 실천하여 實質剛健의 정신을 함양하는 등 그들만의 독특한 무사도는 일본의 思想史에서 확고 부동한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다. 이 武士 정신은 江戶時代에 이르러 한층 세련된 형태로 다듬어졌다.
江戶時代의 신하는 평상시 정치에 참여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임무가 없었으므로 주인의 御恩으로 신하가 생활할 수 있다는 관념이 강했다. 게다가 유교가 보급되어 武士들은 農工商을 지배하는 계급으로서 무사들에게 교양 있는 행동이 요구되었다. 신하가 주인에게 奉公의 義를 다하는 것이 의무가 되었고 주인에게 경제적 보상을 받았다. 즉 자신이 속하는 藩의 영주로부터 俸祿을 받고 생활하고 있었다. 江戶時代 전반기의 일반적인 主從關係는 생활의 보장의 대가로서의 충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무사들은 將軍에게 직접적으로 忠節을 다한 것이 아니라 藩主 즉 자신이 속하는 藩의 大名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儒敎, 즉 朱子學이었다. 朱子學의 忠節 사상으로 생활의 보장의 대가로서의 충절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를 부여하였다. 때문에 賴朝 이후 鎌倉武士道와 江戶時代 전기 武士道는 충절을 바치는 대상이 전자는 將軍이고 후자는 大名이라는 차이는 있어도 생활의 보장에 대한 대가로서는 동질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江戶時代 전반기 將軍과 大名과의 관계는 德川家康이 全國大名들에게 영지를 분배하기는 했어도 전국대명들은 자신의 領地를 가지고 있는 領主이기도 하였으므로 그들의 관계는 힘에 의한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였다. 막부는 大名들의 동향에 신경을 쓰면서 大名들이 뭉치는 것을 경계하였다. 家康이 유교 중심의 文敎政策을 편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더 이상 불필요한 戰爭을 막고 武士들도 시대에 맞는 교양과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가신이었던 무사들의 충절을 형식적으로라도 장군에게 향하게 하기 위해 儒敎가 이용되었던 것이다.
士道의 측면에서 武士道 敎義의 鼻祖가 되는 사람이 山鹿素行이다. 素行은 평화의 시대에서의 武士들의 존재 이유나 가치,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많은 武士들을 감화시켰다. 그리고 주군에 대한 忠誠을 핵심으로 하는 武士道는 山本常朝의 "葉隱"는 "죽음에 대한 각오가 서 있지 않으면 무사도를 추구할 수 없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주군에 대한 순수한 감정과 항상 죽음을 앞에 두고 생활하는 자세는 죽음이 진정한 무사의 삶의 전제 조건임을 가르친 것 같다.
江戶幕府가 무너지고 봉건적인 신분체제가 붕괴되면서 武士라는 사회계급이 없어지고 四民平等의 明治時代를 맞이하게 되었다. 社會階級으로서의 武士는 없어졌지만 武士道 정신은 국민 모두에게 일반화되면서 武士만의 도덕이 아니라 일본인 전체의 도덕이 되었다. 이 國民武士道는 과거 武家式士道와 다른 조정, 천황을 절대적으로 받들어 모시려는 勤皇式士道이다. 모든 국민이 하나가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국민에게 武士道 정신을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은 1873년 徵兵制에 의한 國民皆兵制 실시와 1872년의 軍人勅諭, 그리고 敎育勅語였다. 軍人勅諭는 충절, 예의, 무용, 신의, 질소의 덕목을 강조하여 모든 남자는 대일본제국 군인으로서 호국의 사명을 다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鎌倉時代 이래 약 700년 간 무사들이 실천하고, 또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얻어진 武士道의 내용을 집대성하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주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天皇에 대한 충절은 당연한 것이고 武士道의 중심적인 내용인 武勇이나 禮義, 質素의 정신 등은 瘡時代 이래 형성된 일본 정신으로서 명치시대 이후의 국민정신의 근간이 된 것이다.
요컨대 武士道의 내용의 핵심은 충효임을 알 수 있다. 무사도가 문무양도 즉 봉건시대에서는 武技와 하나가 된 것이었으나 明治時代 이후 모든 사회분야에서 그 충효의 정신을 발휘할 수 있도록 武士道는 승화되었다. 오늘날 일본인의 상식 중에는 간접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무사도의 영향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무사도는 일본인에게 善과 惡, 正과 不正 등 제반 도덕적 관념을 가르쳐 왔던 것으로서, 일본의 봉건 제도와 무사도를 모르면 현대 일본인의 도덕관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빈약한 천연 자원과 협소한 국토를 가지고 오늘날 일본이 세계를 움직이는 국가의 하나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은 무사도 정신임에 틀림없다. 또한 비인간화와 윤리 도덕이 붕괴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이를 회복하는 데에 武士道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의 가능성은 적지 않다고 본다. '죽음의 각오'에 대한 무사의 결연함, 미련없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자세 등은 다른 인간 관계의 장에서도 모양을 달리하면서 바람직한 生의 자세로서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가장 진보된 사상을 가진 현대의 일본인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사무라이'가 존재하고 있다. 일본인의 명예와 용기, 그리고 모든 무덕의 유산은 선조의 것임과 동시에 현대 일본인의 것이며 아울러 일본인 후손의 것으로 영원한 정신적 유산인 것이다. 현대 일본인의 민족성과 도덕 그리고 철학 속에 무사도는 융해되어 존재하며, 일본인이 일본인인 이상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1. 니시와키 미쯔루, 「日本武士道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1999.
2. 니토베 이나조 원저; 이만회 편저, 「무사도」, 학문사, 2001.
3. 도날드 G. 크라우제 지음; 박길부 옮김, 「사무라이 경영전략」, 예하출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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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5.05.09
  • 저작시기2005.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6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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