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와 실학을 비교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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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序論

本論
1. 實學思想
2. 開化思想
3. 實學思想과 開化思想 비교

結論

본문내용

운동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開化派의 形成
초기 개화파의 형성에는 박규수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박규수는 1874년에 우의정을 사퇴하고 한거생활을 하면서 그의 사랑방에 출입하는 젊은 양반의 자제들에게 조부 박지원의 연암집을 강의하기도 하고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이나 역관들이 전하는 신사상을 알려 주기도 했다. 이 때 양반 소장파들로는 김홍집, 金允植, 어윤중, 金玉均, 朴泳孝, 서광범, 洪英植 등이 있었다. 그러나 박규수의 생존 중에는 그 문하에 모인 양반소장파가 차차 사상적으로 결속되었지만 정치적결사로서의 성격을 갖추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877년 박규수가 세상을 떠나자 북경에 10여회나 왕래한 바 있고 박규수의 知友였던 역관 오경석은 한의사인 그의 盟友 유홍기에게 북경에서 가져온 신서를 제공하여 세계의 새로운 동향을 연구시키고, 젊은 소장파에게 목적의식을 가지고 접근시켰다. 이때의 신서로는 魏源의 「海國圖志」 등이 있었다. 1879년에 오경석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이제는 유홍기가 김옥균가 만나게 되고 그는 그 후로부터 초기 개화파의 사상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갑신정변에 이르기까지 그 支柱的 존재로서 위치를 점하였다. 한편 유홍기가 김옥균에게 서울교외에 있는 奉元寺의 개화승 李東仁을 소개하게 되었고 그가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유력한 동지가 되었다. 이들은 빠른 시일 안에 국가를 근대적인 체제로 개혁해 보려고 여러 면으로 활동하였다. 외세의 도전에 대응하여 국가의 독립을 견지하기 위해 외교교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열강의 외교사절들과 폭넓게 접촉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에는 급진적인 면이 많아 유교적이고 士族的인 인사들은 뜻을 달리하여 분리되어졌으며 또 당시의 사회도 그들의 사상과 행동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되지는 못했다. 때문에 일반국민들로부터 경원시 되고 비판까지 받게 되었다.
3. 實學思想과 開化思想 비교
실학은 유학자중 이념적이고 사변적인 것보다 현실적이고 실증적인 학풍으로 나아간 경향이고 개화사상은 서구 유럽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어 보자고 하는 사상으로 기초가 되는 것은 근대서구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어서 실학과 개화 사이에 확연히 구별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개화사상가 중에서는 실학자의 계열도 있으나 그분들의 학문적 기초는 유학자이지만 서구문화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었다는 점이다.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개화 사상가였다는 점에서 인적인 맥락에서 연결되기도 한다.
실학이나 개화사상이나 모두 우리나라 지배계층의 주류를 이룬 것이아니라 소수파였고 주도세력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학도 현실세계에서 실천되지 못했고 개화사상도 서서로는 주도를 못하다가 나중에 일본이나 서구열강의 압박에 개항을 하며 의타적인 개화를 해나가게 되는 불행이 따랐다.
結 論
본론에서 살펴봤듯이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개화사상이 형성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조선 사상사에서 실학사상이 차지하는 위치는 주자학이 봉건적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활력을 점차로 상실하고 개화사상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는 중간기에 유교적 전통 사상을 답습하면서 그 가운데서 점차로 근대적 요소를 낳았던 사상 체계이다. 따라서 실학사상은 근대 조선에 있어서 개화사상의 원류가 된다고 할 수 있으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실학사상에서 현저히 나타나는 바와 같이 지도지전설과 같이 지도에 대한 신지식에 의거하여 華夷思想의 명분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청국에 대한 <事大>와 <倭夷> 및 <洋夷>에 대한 자주적인 입장을 주장했다.
둘째로는 앞의 이야기와 관련되지만 자주적 개국론이다. 즉 쇄국에 의한 고립주의에 반대하여 개국에 의한 해외 통상과 청국 및 유럽의 과학 기술을 도입하여 利用厚生에 사용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화파는 이미 1875년의 일본에 의한 운양호사건과 그것에 잇따른 강화도 조약이 있기 이전부터 자주적 개국을 주장했던 바로서 부강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뛰어난 과학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셋째로는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이미 그 질곡으로 되어 있는 낡은 제도와 질서의 개혁을 요구하는 경세사상 이다. 실학사상은 그 당시의 역사적 제약 가운데서 봉건 제도의 틀 안에서의 개혁 사상이고, 개화사상은 이미 봉건제도의 틀을 뛰어넘은 부르조아 개혁 사상이였지만 공통된 점은 변동하는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생산력과 그것을 담당하는 민중의 입장에 서서 그 발전을 저해하는 기성 질서를 개혁한다고 하는 민주적 자세이다.
넷째로는 봉건적 지벌과 문벌에 반대하여 농민과 상인의 자식이라도 有才有學하면 묘당(벼슬자리)에 오르고 공경의 자식이라도 無才無學하면 종이 되어도 한이 없어야 한다는 능력 본위의 인재등용과 놀고먹는 양반도 농업 상업 기술 등의 생산적 직분에 임해야 한다고 하는 萬民皆勞의 사상이다. 이것은 개화사상에 이르러 인간평등의 사상으로 발전했다.
다섯째로는 국내 시장의 형성에 있어서 그 커다란 장벽이었던 교통수단의 정비에 관한 주장이다. 박지원의 <車制>, 박제가의 <통상선의>, 김옥균의 <治道略論>, 박영효가 한성 판윤 때 설치한 <治道局> 등은 일련의 계승 관계에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여섯째로는 주자학적 속박에서의 인간 이성의 해방이다. 이것을 전제로하여 비로소 근대적 과학 정신은 육성된다. 실학파에 있어서의 백과전서적 지식은 당연히 그 후에 있어 각 분야별로 분화 발전될 근대과학과 사상의 모체가 되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실학사상 가운데서 볼 수 있다.
* 참 고 문 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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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7, 국사편찬위원회 편집부 지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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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섭, 한국사통론, 삼영사, 2000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 역사비평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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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6.03
  • 저작시기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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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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