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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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추사 김정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 론

1) 동 기

2. 본 론
1) 시대적 배경
2) 생 애
3) 추사의 서화사상
(1) 시․서․화 삼절
(2) 서화의 특징

3. 결 론

본문내용

립된 독창적인 개성을 꽃피운 것이라 하겠다. 양호가 아닌 돈모필인 호에 붓끝인 봉이 없는 독필로 썼다고 한다.
그는 생애의 고비마다 심경의 변화가 서체에 드러나는데 귀양갈 무렵에는 서체가 아주 험하고 위가 벌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제주도와 북청 유배 기간 동안 그의 학문과 예술은 더욱 깊어져「노모노지도」는 제주 유배 도중 남원에서,「세한도」,「무량수각」,「시경헌」등의 편액 등이 제작되었다.
이 기간은 추사 개인적으로는 불행했던 시기였으나 그의 학문과 예술을 위하여 본다면 도리어 다행이었다.
서법이란 서사의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서법관을 투철히 하여 비, 첩에 대한 안목을 높일 것을 주장하였다.
모든 서체가 기요, 그야말로 전신의 기운으로 전력투구하여 썼던 것이다. 추사는 학문의 세계나 예술의 세계 모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었는데 그의 회화세계 역시 청조 고증학을 토대로 뚜렷한 서체와 함께 일체적 경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회화는 제주도 유배생활 이전의 것과 이후의 것으로 나누어지는데 서예에 비하여 작품 수는 많지 않으나 크게 묵란화와 산수화로 분류할 수 있다.
청대의 정섭은 “지상지죽” 즉 ‘종이위의 대’라는 뜻으로, 작가가 작품을 그릴 때 죽의 진실한 형태도 정신적인 인상도 필요 없으며, 다만 필묵의 임리적 취미가 필요하다는 뜻인데, 이 점은 원대의 예찬이 그의 화론에서 “초조한 일필로는 그 형사를 구하지 않는다.” 고 한 말과 일치한다.
김정희는 정섭의 묵란화 양식을 분석 참고하면서 자신의 묵란화 세계를 한층 발전시켰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김정희 자신의 글로도 그 파악이 십분 가능하다.
정판교가 그렸다고 하는 난정은 마치 원필과 흡사하나 감히 확정지을 수는 없는 듯하다. 필치가 있는 외에 별도로 묘체를 갖추고 있으나 절대로 화의가 높다고는 할 수 없다. 모란분도에서는 일필도 화의와 흡사함이 없어서 좁으면서도 날카로운 필치라고는 할 수 없는 점을 볼 수 있다. 순전히 삐치는 법으로서 그것을 그렸음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이 평생동안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남들은 이것과 비슷함조차 얻지 못했던 것이다. 이 그림은 상당히 화의를 갖추고 있어서 비록 극히 자유 분방하더라도 좁으면서도 날카로운 필치를 찾아볼 수 있는데 사람들은 약간의 힘만을 얻어 비슷할 뿐이다. 그리고 필세 또한 자유분방하면서 거리낌이 없는데 모란에 제한 것과 대조해 보면 지극히 자유분방한 가운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또한 원만하면서도 간략한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자유분방할 뿐이다. 그리고 인장은 모두 스스로 새긴 것으로, 모란에 찍힌 난관은 반쯤 훼손된 판교의 인으로 신묘한 취향이 특이하다. 이 그림의 두 도장은 모두 스스로 새긴 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거칠고 혼란한 기운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점에서 그것이 진적이라고 확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판교의 문하에는 위작에 능한 자가 있었으며 혹은 이렇게 대신 만들어 구하는 자의 요구에 응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
위 글은 김정희 자신이 정섭 회화에 얼마나 긴밀히 접해 있었는가를 또한 그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음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힘찬 기세로 삐치고 있는 김정희의 묵란선은 주로 갈필을 사용하여 초서의 중견장별법으로 난엽을 묘사했던 정섭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정섭 묵란 양식의 영향은 난엽에서 뿐 아니라 꽃잎과 꽃술의 표현에서도 보이고 있다.
그는 묵란화에 있어서 회화의 한 장르를 세웠으며 회화에 있어서는 대상성격보다도 문인화에서 가장 중시하는 화가의 심의, 즉 자연의 추이에 따르는 심의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회화경향은 그 당시 흐름과 병행하여 나타난 것인데 그것은 영조 연간에 대청 관계가 정치적으로 점차 안정되어가자 자연히 중국의 남종화풍이 조선화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 때문에 회화에 있어서는 당연히 시, 서, 화 일치라는 시대의 흐름으로 서화의 변화를 끌고 갔으며, 그리하여 대상성격을 충실히 묘사하는 진경 산수나 풍속화를 멀리하게 되었다.
추사의 회화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자연의 형태를 빌어 표현하려는 그의 노력으로 생략과 상징을 통해서 높은 정신적 차원으로 승화했으며 그가 표현하고 있는 인생의 고독과 적막감은 생명을 불어넣은 한 획 한 획의 붓 자국에 스며 나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그의 인격의 높이와 학문의 깊이가 절실하게 반영된 회화는 제주도 유배생활동안 이었다. 또한 추사는 불교에 조예가 깊었던 까닭에 그의 회화에 문기와 선미가 함께 풍겨나고 있다.
3. 결 론
추사 김정희는 19세기 중엽에 활약한 서화가로써 추사체라는 파격적인 서체를 독창적으로 창출함과 동시에 남종문인화의 토착화를 통하여 예술세계를 대중 속에 심고 시, 서, 화 등 다양한 학문세계로 달관하여 이른 바 완당바람을 몰고와 아직은 약했던 토속적인 우리의 진경산수와 풍속화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전환기의 인물로 등장되었다.
그의 서화관은 인간의 정신적 순수성, 도덕적 성실성을 중시하는 유가미학에 근거하여 문자향과 서권기를 중시하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즉, 추사의 회화세계는 서체의 정신세계와 유사하여, 대상물의 외형을 재현하려는 형사에 치중하기 보다는 그리는 대상물에 의한 작가의 내면세계를 표출하는 사의적 태도를 중시하였다.
화법에 얽매이지 않는 대담하고 자유로운 화면구성과 예서의 조형미, 추상미를 느끼게 하는 강력한 필치로 개성이 강한 독자적인 문인화풍을 보여주는 묵란화를 많이 그렸다.
추사가 후대에 끼친 영향력은 추사의 화풍을 따랐던 조희룡, 허련, 이하응, 전기 등의 묵란화가들의 배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묵란화는 그 당시 화단의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추사는 남종문인화의 기반을 다져 명맥을 유지했으며 문인취미의 관념미와 정신적인 측면을 중요시하는 면에서 화풍을 형성하였고 묵란화에 있어서 조형미와 추상미를 표현함으로서 남종문인화를 통한 묵란화의 새로운 경지를 이루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차지하는 회화사적 비중은 높게 평가되어야할 것이다.

키워드

김정희,   추사,   한국화,   서예,   묵란화
  • 가격2,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6.02.04
  • 저작시기2007.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0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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