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부터 중일전쟁까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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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태평천국부터 중일전쟁까지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태평천국운동과 중국사회의 변화

2. 양무운동의 실패와 그 요인

3. 중화제국질서의 붕괴

4. 변법운동과 입헌운동

5. 반기독교 운동과 의화단

6. 공화혁명(신해혁명)

7. 5•4운동

8. 국공합작과 국민혁명

9. 남경국민정부시대

10. 중일전쟁

본문내용

료독점자본을 옹호하여 민족자본의 발전을 저해하였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성과들에 의하면 남경정부는 내전과 외침이라는 제약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중국의 근대화를 추구하였다. 특히 외교 적인 측면에서는 비록 국력이 약하여 완벽한 관세자주권의 회복이나 영사재판권의 폐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1928년부터 1930년 사이에 체결된 새 조약에서 관세자주권을 규정하는 등 제국주의세력에 빼앗긴 주권의 회수에 노력하여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관세자주권의 회복으로 국민정부는 관세를 인상할 수가 있었고 또한 국내산업을 보호하 는 관세를 마련해 각종 산업진흥정책을 펴서 공업제품에 대해 통일소비세를 부과할 수 있 었다. 관세증가와 통일소비세 신설 외에도 국민정부는 염세를 정리하여 세수를 증가 시켰다. 외채에 의존하여 재정자립도가 낮았던 원세개정부나 군벌시대에 비해 남경정부는 민국시대에 들어와 사상 처음으로 풍부한 중앙 세수를 확보하여 권력기반의 확립에 성공하 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정부가 자본주의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고 또 자본가계층의 지지를 국가권력의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중국 자본주의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1차대 전기의 민족산업의 황금기를 이어 국산품이 수입품을 대체하는 수입대체 공업화가 경공업 을 중심으로 진전되었다. 이러한 공업화는 경제법의 정비, 수입관세 인상을 비롯한 국내산 업 보호정책, 통화제도의 통일과 안정화, 각종 산업정책 등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것이 었다.
국민정부의 통화정책은 산업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종래에는 각종 은화를 기본으로 하여 동전, 지폐 등이 멋대로 유통되었는데 이러한 은본위제에서는 국제적인 은가의 변동 에 따라 외국환율이 크게 오르내려 국내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다. 국민정부는 1933년 일정 한 무게를 중심으로 값을 매기는 은냥을 폐지하였고 1935년에는 폐제개혁을 실시하여 정부계 은행이 발행하는 법폐로 통일하였다. 정부계 은행이 법폐를 매입하게 됨에 따라 외국환율이 안정되었다. 은화의 높은 환율과 은화유출에 따른 금융난으로 공황에 시달리던 중국 경제는 폐제개혁 이후 급속히 경기가 회복되었다.
물론 이 시기의 경제발전이 항상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세계 공황과 일본의 만주점령 의 영향을 받고 또 잦은 내전과 자연재해로 1930년대 초 공장수와 자본액의 감소를 보이기 도 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민국시대의 그 이전 정권 때와 비교할 때 국민정부는 경제발전이란 측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보였다.
국민정부는 또한 농촌부흥위원회와 중국경제위원회를 두어 1920년대부터 지식인들이 추 진해온 향촌건설운동을 지원함으로써 농촌문제의 해결을 도모하였다. 그 내용은 주로 향촌 에서의 자치, 교육보급을 통한 생활개선에 역점을 둔 것이었다. 아울러 1차대전 후 패배의 잿더미에서 강국으로 부상한 독일, 이탈리아를 학습대상으로 삼아 예의염치의 원칙에 따라 구도덕을 회복하고 사회의 악습을 쓸어내며 신생활을 실천하자는 신생활운동 을 추진하였다. 이는 공산당의 지배로부터 수복한 지역에 고유문화를 다시 일으키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가진 것이었다. 대체로 국민정부의 향촌건설운동이나 신생활운동은 농촌 의 토지소유의 불균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0. 중일전쟁
1931년 9월 18일에 일어난 만주사변(滿洲事變)도 일본이 중국의 동북지방을 군사적으로 제패하고 이 지역을 ‘만주국’이라 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만든 것이니, 당연히 ‘전쟁’이라고 해야 옳을 것을 일본은 이를 사변이라 하였고 선전포고도 하지 않았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北京] 교외의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일본군이 일으킨 군사행동으로 말미암아 확대된 이 전쟁은, 분명히 만주사변의 연장임에도 불구하고, 이때에도 ‘루거우차오사건’ 또는 ‘지나사변(支那事變)’이라 하여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이것은 청일전쟁 이후 중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듯한 멸시감을 일본 국내에 조장시키고, 중국에 대한 군사행동을 마치 ‘아시아 혁신’의 사업인양 거짓을 꾸민 일본정부의 정책발로였다. 루거우차오사건 이후 베이징 ·톈진[天津]을 점령한 일본은 전화(戰火)를 상하이[上海]로 확대시키고, 1937년 12월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하여 시민 수십만을 살육하였다. 그 뒤 우한[武漢]을 공략하고 광둥[廣東]에서 산시[山西]에 이르는 남북 10개 성(省)과 주요 도시의 대부분을 점거하였다.
한편, 중국측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으로 항일(抗日)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여 항전하였다. 중국군의 유격전에 따라 일본군은 광범한 전선에서 ‘점(도시)과 선(도로)’을 유지하는 데 불과하게 되었다. 그런 중에도 일본군은 삼광작전(三光作戰:殺光 ·燒光 ·光) 등 잔학행위로 전쟁 전기간(全期間)에 걸쳐 중국인 1200만 명을 죽였으며, 중국 민족 그 자체를 적으로 한 전쟁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일본은 수백만의 대군과 온갖 근대병기를 동원하는 한편, 왕자오밍[汪兆銘] 등의 괴뢰정권을 수립하여 전쟁을 수행하였으나, 중국 민중의 항전 의지를 꺾지는 못하였으며 전쟁은 장기화하였다. 일본은 이러한 국면 타개를 위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함으로써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전황을 악화시켰다. 이리하여 중 ·일전쟁은 태평양전쟁의 일부가 되었으나, 일본군의 사기는 저하되고 군기도 문란해졌으며, 105만에 이르는 대병력은 이미 제2전선(第二戰線)이 되어버린 중국 전선에 못박혀 있음으로써 제구실을 못한 채로, 1945년 8월 15일 포츠담선언 수락과 더불어 국민정부에 항복하였다.
※참고문헌
http://chungbuk.ms.kr/social/social-2/3/1/31-2/ja4.htm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6&dir_id=604&docid=249552
네이버 백과사전
중국 근현대사 출판사: 지식산업사
중국사서설 출판사: 교보문고 저자: 이춘식
강좌 중국 근현대사 출판사: 역사교양사 조훈 편역
중국근대사 출판사: 예전사 천성림 역
1.태평천국운동과 중국사회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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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6.22
  • 저작시기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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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03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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