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연대기 1894-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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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1894 ~ 1898

2) 1899 ~ 1902

3) 1903 ~ 1906

4) 1907 ~ 1910

5) 역사를 통해본 인권

6) 참고 자료

본문내용

니라 민족의 이름으로 행한 처단이었다. 국내와 해외에서는 젊은이들의 가슴에는 애국적 열정이 들끓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사건은 한일병합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09년 관련 선언 책자
- 의병장 허위의 통감부에 대한 30개조 요구
1910년 일제 조선총독부 설치
6월 경찰권을 일본에게 넘겨줌
- 일제, 이완용정부와 한국의 경찰권을 최종적으로 탈취하는 〈경찰사무를 위탁하는 한일약정서> 체결. 순종은 이름만 황제일 뿐 아무런 권력도 갖지 못한 꼭두각시였다. 일제 경찰은 조선 사람을 순사로 써서 하수인으로 삼아민족 주의자들, 독립투사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6월 유인석 이상설 등,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의군 편성
- 1910년 9월 짜르 러시아정부의 탄압으로 와해될 때까지 국권회복을 위해 의병세력을 합한 기관이다. 고종에게 러시아의 연해주로 와서 망명정부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영도할 것을 간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8월 한일병합조약 조인
-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식민 통치의 중추 기관으로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강력한 헌병 경찰 통치를 실시하여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독립 운동을 말살하려 하였다.
--> 이로써 대한제국은 막을 내리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전국 각지에는 잇달아 순국하는 이들이 생겼다.
12월 회사령 공포
일제는 한반도를 일본 공업 발전의 원료 공급지로 삼고 독점 상품 시장으로 착취하기 위해 회사령을 공포.
--> 조선 총독의 허가 없이는 회사를 설립할 수 없도록 하는 법으로 조선 민족의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막았다.
1910년 관련 선언 책자
- 성명회 선언서
-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 총회의 결의안
5) 역사를 통해 본 인권
개항 이후 개화정책에 따른 농민들의 수세부담이 증대하였으며, 지방관들의 탐학은 여전하였고, 일본과 청의 경제적 침투로 말미암아 농촌경제는 파탄되어 갔다. 그러나 정부는 자주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였고, 더구나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경제를 좀먹는 일본에 대한 농민들의 반감이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동학혁명이다. 동학혁명은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지만 대내적으로는 전근대적인 사회체제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혁명운동이라는 점에서,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나타낸 역사적 의의를 갖게 되었다.
동학혁명을 무산시킨 조선정부는 갑오개혁을 추진한다. 일본의 간섭이 있었으나, 일본은 청과 전쟁 중이었으므로 이 개혁은 비교적 자주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특히 사회면에서는 양반과 평민의 전통적인 계급을 타파하고 노비제도를 혁파하는 등 신분제도를 완전히 개혁하였다. 그러나 개혁이 진전되면서 점차 일본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쳐왔고, 개혁의 방향 또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사회체제를 변형시켜 일본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려는 것으로 되어갔다.
그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는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운동의 중심조직이 독립협회(獨立協會)였다. 이는 구미의 근대사상을 받아들인 지식인과 개혁적인 사상을 가진 유학자들이 주도 하였는데 보수적인 집권층은 이를 탄압하여 강제로 해산시키고 말았다. 결국 독립협회의 활동 역시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 개혁운동은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국민의식을 형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민족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는 사상적 기반과 함께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는 것이었다.
1900년대에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데 기인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統監府)를 두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함으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은 사실상 침탈되고 말았다. 뒤이어 1910년에는 합방조약을 의결하여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다.
일제의 침략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운동은 여러 방향에서 끊임없이 전개되었으며, 국권을 상실한 뒤에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민족운동으로 확대, 계승되었다. 이러한 민족운동 가운데 특히 뚜렷한 움직임으로 연결된 것이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의병운동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자극받아 일어난 을미사변에서 비롯되었다. 의병장은 대개 지방의 명망 있는 유학자들이었다. 그 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확대되었고, 군대가 해산되면서는 무장과 조직이 강화되어 의병운동은 전면적인 항일전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의병운동은 점차 무력의 열세와 일본군의 대규모작전에 의하여 위축되어 갔으며, 특히 국권이 침탈된 뒤에는 대부분의 의병들이 국외로 이동하여 독립군에 합세하였고,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의병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일어난 항일운동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며 가장 효과 있는 운동이었다. 그것은 개항후의 위정척사운동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초기에는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점차 평민 출신의 의병장도 배출되고, 그 구성에 있어서도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망라됨으로써 전 국민이 참여한 범민족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한편, 애국계몽운동은 민족 산업을 육성하려는 경제자립운동을 비롯하여, 국민들의 정치사상과 사회의식을 향상시키기 위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 신민회(新民會)등 정치 · 사회단체들의 활동으로 나타난다. 또 ‘황성신문 皇城新聞’,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新報’등 언론기관의 국민계몽운동, 사립학교와 각종 학회를 통한 민족교육운동, 국사와 국어를 연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국학운동, 기독교 · 유교 · 불교 · 동학 · 대종교 등 종교계의 계몽활동으로도 전개된다.
1910년 한일합방에 따라 일제는 종전의 통감부를 총독부(總督府)로 바꾸고 무력으로 한국을 지배함으로써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6) 참고 자료
- 네이버 백과사전 지식 검색
- 민주화운동 기념 사료관 역사 자료실
- 엠파스 통합검색
- 국사편찬위원회
- 오백년 왕국의 종말/한길사
- 이야기 한국역사/풀빛
-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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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6.22
  • 저작시기2005.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04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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