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기본성격(초기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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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왕조의 기본성격(초기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조선의 성립
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⑵ 새 왕조의 시작
⑶ 국가체제의 완성

2. 정치·사회의 개편
⑴ 중앙의 정치 기구
⑵ 지방의 정치 기구
⑶ 균역제도와 군사조직

3. 조선 초의 대외 관계
⑴ 명과의 관계
⑵ 여진과의 관계
⑶ 일본과의 관계

4. 경제생활
⑴ 농업의 발전
⑵ 수공업의 발전
⑶ 상업의 발전

5. 민족문화의 융성
⑴ 성리학의 발달
⑵ 편찬 사업
⑶ 한글의 창제
⑷ 과학기술의 발달
⑸ 예술의 발달

6. 사림의 성장과 그 문화
⑴ 사림의 등장
⑵ 훈척와 사림의 대립(4대사화)

본문내용

를 회복하는 일을 급선무로 내세웠다. 그리하여 무리한 부국강병책과 영토확장정책을 비판하고, 기술관이나 서얼이 고관으로 나가는 일, 왕이 내수사를 통해 재산을 축척하고, 훈국대신들이 권세를 이용해 재산을 모으는 일 등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한편, 향촌에서는 중소지주로 있으면서 학문을 쌓은 선비들이 농민들을 자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유향소를 자치기구로 복립할 것과, 주희가 시도한 사창제를 도입해 빈민을 구제하고, 향사례·향음주례 등을 실시하여 계급질서를 안정시키는 도덕규범을 세울 것을 주요 정책과제로 내세웠다.
사림의 정치이상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건설이 요구되었던 고려말·조선초의 역사적 상황하에서는 큰 호소력을 갖지 못했으나, 이미 그러한 과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부분적으로 그 역기능까지 드러내고 있던 15세기 말기에 와서는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사림의 등장은 국가발전을 중요시하는 창업의 시대에서 지방사회의 안정을 추구하는 수성의 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환기에 나타난 새로운 흐름이었다.
⑵ 훈척와 사림의 대립(4대사화)
성종은 훈구세력을 억제하고 문물은 진흥, 발전시키고자 재야의 참신한 인재를 발탁, 등용하였습니다. 이에 사림들은 차츰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사림파 세력을 형성하여, 학문적·정치적 입장이 다른 훈구세력과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은, 조선전기의 정치를 주도한 훈구파와 새로이 등장한 사림파와의 대립은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 때 사화로써 표면화되었습니다. 연산군의 거듭되는 실정을 계기로 무오사화·갑자사화가 그것입니다. 또한 중종대에 일어난 기묘사화와 명종대의 을사사화가 있었는데, 이러한 사화는 곧 신·구 관료 사이에 벌어진 정권다툼으로, 이를 흔히 당쟁이라고 합니다.
연산군 4년(1498),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와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 사이에 일어난 사화를 말합니다. 김종직의 제자인 사관 김일손은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사기의 초고)에 올렸는데, 《조의제문》의 내용인 즉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항우에게 죽음을 당한 초나라의 희종에 비유하여 그 죽음을 매우 슬퍼하고, 세조의 왕위찬탈을 격렬히 비난한 것입니다.
이를 본 훈구파의 유자광·이극돈 등이 연산군을 충동하여 김일손·정여창 등 사림파를 대거 숙청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오사화입니다. 이 결과, 훈구파는 다시 요직을 독점하였습니다.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이 사치와 향락을 일삼게 되자 나라의 재정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에 연산군이 훈구파 대신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려 하자, 훈구파 대신들은 연산군의 행동을 억제시키려 했지만 연산군의 미움만 사게 되었습니다.
이를 눈치챈 임사홍 등이 세력을 잡고자 하여, 연산군의 생모 윤씨 폐출 사사사건을 들추어 공개하자, 연산군은 대노하여 훈구파 대신들을 대거 죽이거나 귀양 보냈습니다. 이것이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입니다.
그 뒤 연산군의 향락과 방탕은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성균관을 폐하여 연회장으로 삼는가 하면, 자기를 비방하는 한글 벽보가 나붙는 것을 계기로 한글의 사용을 금하고, 한글서적을 모두 불사르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훈구파 대신들은 연산군 12년(1506),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세우는 중종반정을 일으켰습니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사림파의 소장 학자인 조광조를 등용하여 유교주의적인 개혁정치를 시도하려 하였습니다. 조광조는 미신을 타파하고, 상호부조를 바탕으로 하는 향약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사림의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왕의 친시(왕이 직접 시험하는 것)로써 채용하는 현량과를 만들어 인재들과 신진사류를 대거 등용하였으며, 반정공신인 훈구 대신이 가진 토지를 몰수하여 다시 조정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분격한 훈구세력은 조광조가 왕이 되어 한다고 모함하여,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세력을 몰아내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소위 기묘사화라 하고, 이 때 죽은 사람들을 기묘 명현이라 합니다.
기묘사화가 있은 지 10년 뒤에 중종은 훈구대신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했으나, 1545년에 명종이 즉위하면서 일어난 소위 을사사화에 또 다시 밀려나는 네 번째 화를 입었다. 이 사건은 외척간의 권력싸움에서 빚어진 것이 다른 사화와 그 성격이 다르다. 즉 중종이 승하하자, 첫째 계비의 소생인 인종이 즉위하고 왕비의 동생인 윤임이 세력을 떨쳤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타계하자 둘째 계비인 문정왕후의 소생인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명종 역시 어린 관계로 왕후가 수렴청정하고 그의 동생인 윤원형일파가 실권을 장악했는데, 집권하자마자 전 왕의 외척인 윤임 일파를 몰아낸 것이다.
명종 때에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숭신하여 보우를 봉은사 주지로 삼고 선교 양종을 다시 부활하여 오랜 만에 불교가 중흥하였으나 사림의 비난을 샀다. 또한 북방이 어수선하고, 임꺽정 일당이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활약하여 사회가 불안했으며, 명종 10년(1555)에는 세견선의 감소로 곤란을 받아온 일본인들이 60척의 배를 끌고 전라도를 침범해 왔다. 이를 을묘왜변이라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비변사가 강화되었다.
을사사화는 외척간의 권력싸움에서 발단된 것이지만, 양편에 모두 사림이 가담하여 사림끼리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모습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사건으로 사림의 기세가 꺽이기도 했지만, 이미 전국적으로 확산된 사림의 정계진출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명종 때에는 이황·조식·성수침·이항·기대승·김인후 같은 명망 높은 사림학자들이 재야에 은거하여 벼슬을 포기하기도 했지만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가 16세기 후반의 선조 초에는 그 이전의 외척세력을 몰아내고 사림이 전적으로 정치를 주도하는 시대가 열렸다. 선조 때에도 척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도 사림으로 변하여, 무오사화 이후 70년간 정국을 특정 지워온 훈척과 사림의 대립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끝 -
(참고문헌)
서울대 교수 한영후 《다시찾은 우리역사》경세원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들녘
19세기정치사연구반 지음 《조선정치사 (1800-1863) 상 》서울 : 청년사, 1992
  • 가격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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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7.11
  • 저작시기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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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06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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