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전의 티베트의 역사와 중국과의 역사적 관계에 관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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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대 이전의 티베트의 역사와 중국과의 역사적 관계에 관한 보고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티베트의 역사
(1) 신화시대
(2) 토번 왕국의 건국과 발전
(3) 분열기
(4) 달라이 라마에 의한 통치
2. 티베트 불교의 역사
(1) 제 1 차 불교의 유입
(2) 제 2차 불교의 전래
(3) 독특한 티베트 불교의 형성
(4)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불교
3. 티베트와 중국과의 역사적 관계
(1) 당 · 송과 티베트
(2) 원과 티베트
(3) 명과 티베트
(4) 청과 티베트

Ⅲ. 결론

본문내용

정권다툼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폴라나를 패자 혹은 군왕으로 책봉하였다. 이에 대해 왕귀 등은 "폴라나는 중국 경내의 호아제로부터 책봉을 받은 일개 소수민족지구의 군왕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폴라나는 황제에게 보내는 상주문에서 자신을 '아주대황제' '동방대주'등의 표현을 통해 청의 황제를 그 국주로 여기고 자신을 청제의 신속으로 자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티베트와 만청 사이의 이른바 '서장선후장정 13조'의 체결을 두고 중국측은 "달라이 라마가 이전에는 서장에서 단지 최고의 종교적 지위만을 갖고 불교만을 통령할 따름이었는데 이에 이르러 그가 서장 지방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이는 완전히 황제가 입법하는 형식으로 결정된 것임을 설명한다"고 하였다.
네팔의 침공을 계기로 청군이 티베트에 다시 진주하고 1793년에 '장내선후장정 29조'가 체결되어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등의 전세가 '금병체첨'의 수속을 통해 확인되고 주장대신의 권한이 크게 강화됨과 아울러 정액 3000명의 티베트 상비군이 건립된 데 대하여 왕귀 등은 " 금병체첨제도는 여러 차례 달라이 라마의 전세영동을 확정하는 데 이용되었고 주장대신과 달라이 라마와의 지위는 상등하였고 카론 이하 관원이 주장대신에 예속되었다"고 평가하였다. "9세부터 13세 달라이 라마까지 매번 전세영동은 확인된 뒤에 청조 황제의 정식 비준을 받아 달라이 라마가 되엇을 때 라사에서는 장엄한 접지 의식이 행해졌다. 주장대신이 정면에서 성지를 읽고 전세영동은 주장대신이 가진 성지를 향해 무릎을 꿇어 절하였으며, 섭정왕과 경사, 서장 지방 정부의 승속 관원 등은 전세영동의 뒤에서 꿇어앉아 주장대신의 성지 선독을 들었다. 그 뒤 달라이의 전세영동은 황은에 감사를 표하고 동향하여 3궤 9고의 대례를 올렸다. 이는 분명 황제와 달라이 라마가 군신 상하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고 하였다.
주장대신이 일개 '대사'에 지나지 않았다 티베트측의 주장은 중국측에 의하여 가장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왕귀 등은 "청조가 공포한 각 항의 치장법전과 규장이 의연히 서장에서 유효하게 실행되었고 주장대신은 여전히 서장에 주재하면서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등과 함께 서장 지방을 통치하였으니 황제와달라이 라마 간의상하 주속 관계는 의연히 유지되었다"고 하였다.
"주장대산은 서장에 파견한 흠차대신으로 부도통이나 내각학사, 시랑 등 2품 대관이 맡은 것으로 그 품계는 각 성의 총독, 순무와 같았다. 또한 '29조 장정'에 규정된 주장대신의 권한은 매우 컸다. 첫째, 달라이와 공동으로 카샤와 카론 이하 대소 문무관원 및 활불을 관할하고 전 서장 인구와 호적 등을 조사하는 행정권을 관장하였으며, 둘째, 금병체첨 의식을 주관하여 조정에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및 황교의 각 대활불 전세영동을 보고하고 달라이 라마와 회동하여 카론, 대본 이하 서장 지방 정부의 각급 관원을 임명하는 인사권을 가졌고, 서장군의 병력을 징집하고 달라이 라마와 함께 대본 이하 각급 군관을 뽑으며 매년 서장군대를 사역하는 군사권을 가졌다. 셋째, 범죄자를 재판, 처벌하고 위법을 저지르는 관리를 조사하는 사법권을 가졌고, 넷째 청 조정의 뜻에 따라 인근 국가와의 교섭 사무를 처리할 수 있는 외사권을 가졌으며, 다섯째 화폐 주조와 조세, 정부 수지 등을 감독하고 세금 부과와 차역의 증감을 결정하는 재정 금융권을 가졌다"고 하면서 "외국에 주재하는 대사가 어떻게 이러한 막강한 권한을 가질수 있는가"라고 반문하였다.
Ⅲ. 결론
서론에서 이야기했듯이, 기본적으로 인식이라는 것은 결국 강자를 중심으로 굴러간다는 데서 우리는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리포트를 준비하는 과정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더욱더 공고하게 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우리의 인식 너머에 있었던 티베트는 오늘날처럼 단순히 중국의 자치구에 그치는 지역, 아무런 인식 없이 주목받지 못할 지역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고유한 건국신화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한때나마 중국을 위협하던 패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순한 종교를 뛰어넘어 불교가 그들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일으켜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나라 자체가 붕괴되어 사라진 때에, 다시 번성한 역사. 그런 부침을 거듭하면서 삶을 이어온 것이 바로 티베트였던 것이다. 원숭이 조상으로부터 시작해 한때는 설역고원의 강대국으로 자리하고 있었고 토번 왕조의 분열로 왕국 자체가 사라지기도 한다. 다시 원의 힘을 빌려 종교로써 나라를 다시 세우고 번성기를 맞이하는 듯 하나 명, 청 왕조가 들어선 후 티베트는 많은 외세의 간섭을 받게 된다. 이제는 중국의 자치구가 되어버린 티베트는 그렇지만 티베트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인식하는 데에 있어서 편리함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런 편리함 자체가 인식상의 오류를 덮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우리가 역사라는 인식의 틀을 가진다면 그런 오류를 정확히 인지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이번 리포트에서 얻을 수 있는 결실은 바로 그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역동적이었던 티베트의 역사. 그런 면에서 티베트는 결코 변방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서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변방을 뇌리에서 잊는다면, 그들의 현재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기존의 주류의 시각이 아닌 비주류 변방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 점에서 이번 리포트는 구체적으로 티베트에 대한 앎과 지식을 넓혀 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지만,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을 넓혔다는 데에도 의의를 두고 싶다. 그런 느낌을 가슴에 담으며, 이상 리포트를 마친다.
참고 문헌
김호동, 「황하에서 천산까지」, 사계절, 1999년
김규현, 「티베트 역사 산책 」, 정신 문화사 , 2003년 1월 25일 초판 1쇄
여동완, 「티벳 속으로」, 이레
김한규, 「티베트와 중국-그 역사적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이해-」, 조합공동체 소나무, 2000년 6월 29일 초판 1쇄
web : 210.220.78.202/new_httpd/column/mongol/mongol_read398.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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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7.26
  • 저작시기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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