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별곡(西京別曲)의 어구해석과 의미구조 및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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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경별곡(西京別曲)의 어구해석과 의미구조 및 내용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 론

2. 어구해석 및 의미구조와 내용

3. <서경별곡>의 주제

4. <서경별곡>에 대한 쟁점
4. 1. 합가(合歌)에 관한 문제
4. 2. <서경> ․ <대동강>과 <서경별곡>의 관계

5. 작자와 형성시기
5. 1. <서경별곡>의 작자문제
5. 2. <서경별곡>의 창작시기

6.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시기
5. 1. <서경별곡>의 작자문제
<서경별곡>은 작자·연대 미상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속요라는 기록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고 흔히 이야기한다. 그러나 익재소악부에 둘째연이 한역되어 있고, 『성종실록』에 <쌍화점>, <이상곡> 등과 함께 남녀상열지사로 배척되었다는 이야기로 보아 고려 때부터 속요로 널리 민간에서 불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속요의 일차적 창작자인 민중에 의해 <서경별곡>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서경별곡>에 나타나는 생활감정과 정서가 봉건시대 민중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던 농민의 그것과는 현저히 다르기 때문에 이 작품의 '근원적' 창작자는 민중 가운데서도 도시 평민층 및 직업적 예능인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또 이름이 전해지진 않았지만 순전한 개인의 창작가요로 보기도 한다.
) 정흥교, 『고려시가 유산연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4.
여증동
) 여증동, 앞의 책.
은 <서경별곡>을 남녀의 대화체로 보고 극을 위한 대본으로 해석하였다.
서수생
) 서수생, 「익재소악부의 연구」, 『경북대 논문집 5집』, 1962.
은 <서경별곡>은 내용 표현을 검토해보면 작자가 유녀임을 알 수 있는데, 유녀 중에서도 수절의 여성이라고 보았다. 내용을 그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으로 보면 이별의 상황은 남자의 출정이거나 남부여대의 호구지책으로 인한 이별일 수도 있고, 공녀제도에 의한 여인 수난의 이별일 수도 있고, 빈번한 교역으로 인한 외국 특히 송이나 원의 상인과의 이별일 수도 있다고 하였다.
5. 2. <서경별곡>의 창작시기
<서경별곡>의 창작연대는 <서경별곡>, <정석가>, 익재소악부의 선후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최동원
) 최동원, 「고려가요의 향유계층과 그 성격」, 『고려시대의 가요문학』, 새문사, 1982.
과 조동일
) 조동일, 「고려가요 갈래시비」, 『고려시대의 가요문학』, 새문사, 1982.
은 고려속요는 대체로 원 지배하에서의 지배층, 즉 왕실과 권문세족에 의해 향유되었던 문학으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서경별곡>도 이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김창룡
) 김창룡, 「서경별곡연구」, 『동방학지』69집, 1990.
은 '서경'이라는 명칭이 쓰이던 기간과 '대동강'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를 고찰하여 <서경별곡>의 제작연대를 『고려사』에 '대동강'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정종 7년(1041년) 이후의 시점으로 책정하고 있다.
정흥교
) 정흥교, 앞의 책.
는 첫째 연의 "닷곤 딪 쇼셩경"이라는 구절은 고려 태조 원년(918년)에 고구려의 옛 성지인 평양을 재건하고 그 이름을 '서경'으로 고친 것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서경별곡>이 평양을 재건하고 '서경'이라고 부르게 된 이후 얼마 되지 않은 기간에 창작된 노래라고 하였다.
박혜숙
) 박혜숙, 앞의 책.
은 <서경별곡>과 <정석가>의 공통부분은 한 쪽이 다른 쪽으로부터 차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익재소악부가 <서경별곡>이나 <정석가>의 한 부분을 옮긴 것인지 혹은 두 노래와는 별도로 독립적인 노래를 옮긴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익재소악부가 두 노래와는 별도의 노래를 옮긴 것이라면 <서경별곡>의 창작 연대는 이제현이 살았던 14세기 이후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고려 전 · 중기에 이미 민간에 정착되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6. 결론
<서경별곡>은 작품만 전해져 올 뿐, 생성 배경 및 경위 등을 전해주는 문헌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작품으로서 <정석가> 등과 같은 작품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정서를 표출하고 있기 때문에 고전 문학에 있어서 <서경별곡>이 차지하는 위치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이상에서 어구풀이와 함께 기존 연구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합가문제, <서경>·<대동강>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대략의 내용을 정리하여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작품 전체의 문맥적인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데 주목하여 <서경별곡>이 서로 독립적인 노래의 합성으로 이루어졌다는 합가설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 합가설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세 단락이 별도의 노래였으리라 보는 입장이 있고, 이와는 달리 첫째, 셋째 단락이 애초에 하나의 노래였으나 그 중간에 둘째 단락이 끼어들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 <서경별곡>의 시상전개의 부자연스러움을 창자가 복수였을 가능성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작자와 형성시기에 있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순수한 개인의 창작이라는 견해도 있는 반면 도시평민층 및 예능인에 의한 것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종합하여 볼 때 유녀에 의한 노래라고 보는 견해도 있었다. 형성시기에 있어서는 10세기말~11세기초에 창작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와, 14세기 이후로 보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앞으로 더욱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우리 고전 무학에 관한 이해가 좀더 깊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문헌
김명준,『고려속요 집성』, 다운샘, 2002.
김창룡, 「서경별곡 연구」, 『동방학지』69집, 1990.
김택규, 「별곡의 구조」, 『고려가요연구』, 정음사, 1972.
박노준, 『고려가요의 연구』, 새문사, 1990.
박재민·최철,『석주 고려가요』, 이회문화사, 2003.
박혜숙, 「서경별곡 연구의 쟁점」, 『한국고전시가작품론』2, 집문당, 1992.
서수생, 「익재소악부의 연구」, 『경북대 논문집 5집』, 1962.
여증동, 「서경별곡 고구」, 『청계김사엽박사송수기념논총』, 학문사, 1973.
정흥교, 『고려시가 유산연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4.
이성주, 『증보 고려시대의 가요』, 민속원, 1998.
전규태, 「서경별곡 연구」, 『고려시대의 가요문학』, 새문사, 1984.
조동일, 「고려가요 갈래시비」, 『고려시대의 가요문학』, 새문사, 1982.
조동일, 『한국문학통사』제2권, 지식산업사, 1983, 155면.
최동원, 「고려가요의 향유계층과 그 성격」, 『고려시대의 가요문학』, 새문사, 1982.
최철,『고려국어가요의 해석』,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6.

키워드

서경별곡,   대동강,   특징,   해석,   쟁점,   고려가요,   속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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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7.28
  • 저작시기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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