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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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 이 글을 시작하며.
2. 본론
1) 백범의 생애
2) 인물로서의 백범의 특징
3) 임시정부와 백범의 독립운동
4) 해방 후 당시의 상황과 백범의 활동
5) 백범김구의 사상과 이념의 특징 - 나의 소원
-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6) 후대 평가
3. 결론
4. 참고문헌
5. 부록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 신탁통치반대운동
- 좌우합작운동
- 105인 사건
- 한인 애국단

본문내용

장하고 무상분배를 반대하면서 좌우합작운동 자체를 외면.
좌익의 박헌영은 반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토지개혁에서 유상 매상은 지주의 이익을 위해 인민경제를 희생시키는 일이라는 점,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긴다는 조항이 없다는 점, 입법기구의 결정이 미군정 당국의 거부권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반대)
* 하지만 합작운동의 사회적 기반은 넓었다. -- 김규식, 여운형을 비롯하여 홍명희 안재홍 원세훈 오하영 최동오 김붕준 윤기섭 이극로 등 각계 인사 100여명이 시국대책협의회를 조직(47.7) 합작운동을지지. 김규식이 위원장이며 안재홍 홍명희등이 참여한 민족자주연맹도지지, 그밖에 민중동맹, 신진당, 사회민주당, 천도교보국당 등 각 정당들도지지.
(6) 좌우합작운동과 미군정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정책적, 재정적으로 지원 (그 의도는 일단 중도세력으로 하여금 정부를 수립케 하여 3상회의 결정을 지키면서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으려는 생각)
미군정은 중도세력의 집권기반을 굳히고 미군정에 대한 지지를 넓히기 위해 좌익쪽의 반대 속에서도 김규식을 의장으로 하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고(1946.12) 안재홍을 장관으로 하는 '남조선과도정부'를 발족시킴(49.2)
(7)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1947년 이후 미국에 간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미국무성이 단독정부 수립을 시사한 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실상 결렬되고(1947.7) 좌우합작위원회의 좌파쪽 주석이던 여운형이 암살됨 ( 1947.7).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감. - 좌우합작운동은 좌절되고 단독정부 수립안이 확정됨.
(8) 좌우합작운동의 의의
미군정이 좌우익 분열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였다는 분석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김규식, 여운형을 중심으로 8.15 후 좌우익 대립의 심화과정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중간파적 정치세력이 비교적 광범위하게 성립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었던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으로 보아야 할 것.
4) 105인 사건
1910년 평북 선천(宣川)에서 안명근(安明根)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있었는데 일본 경찰은 이것을 구실삼아 신민회원과 평안도 일대의 그리스도교 신자 등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을 억압할 계획을 세워, 안명근 사건을 신민회원 등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처럼 조작하여,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이승훈(李昇薰)·이동휘(李東輝) 등 6백여 명을 검거하였다.
그러나 신민회원이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총독암살 음모를 꾸민 사실이 없으므로 그 사실을 부인하자, 일본 경찰은 거짓 자백을 받기 위해, 당시의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明石元二郞]의 지시로 이들에게 가장 악독한 고문을 자행했는데, 그 결과로 6백 명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 105명을 기소하였다. 1심(審)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105명은 불복상고를 제기하여, 2심에서 99명은 무죄석방되고 윤치호·양기탁·안태국(安泰國)·이승훈·임치정·옥관빈 등 6명만이 주모자로 몰려 4년의 징역선고를 받고 복역하였다.
5) 한인애국단
1926년에 김구는 항일 무력 활동을 시작하면서 결사 단체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1923년 일본왕에게 폭탄 투척 사건,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일본왕 생일 축하 식장의 폭탄 투척 사건 등 이봉창·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주요인물
-이봉창 : 1900 8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용산 문창(文昌)보통학교를 졸업,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점원으로 있다가, 1918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기차운전견습생으로 들어갔으나, 1924년 9월 용산 일대에서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하여 간사로 있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형 범태(範泰)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서 철공소 직공으로 일하다가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으로 도쿄[東京]·오사카 등지를 전전하였다. 1931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金九)의 지시를 받고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에는 양이섭(梁履涉)과 이춘태(李春泰)도 연루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왕이 만주국 푸이[溥儀]와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그는 조사과정에서 배후인물인 김구의 신원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가공의 인물 백정선(白貞善)으로 둘러댔다.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윤봉길 : 본관 파평(坡平). 호 매헌(梅軒). 본명 우의(禹儀). 1908년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덕산(德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의 비운을 느끼고 자퇴,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28년 부흥원(復興院), 1929년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같은 활동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자, 1930년 2월 만주로 망명, 다시 상하이로 갔다. 1931년 상하이에서 세탁소 회계원·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전전하며, 김구(金九)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및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駐中)일본공사 시게마쓰[重光葵]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오사카[大阪]로 이송,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키워드

백범,   김구,   신탁통치,   105인,   애국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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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7.29
  • 저작시기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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