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제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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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필제의 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이필제의 난 당시 시대적 상황

3. 이필제의 생애

4. 이필제난의 전개과정
(1) 진천작변
(2) 진주작변
(3) 영해난
(4) 조령난

5. 이필제난의 성격과 의의 그리고 한계점

6. 결론

본문내용

민란에서는 볼 수 없는 사실로서 고립적이고 폐쇄적이었던 농민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심어주게 되었고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필재의 난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설명 할 수 있다.
) 윤대원, "이필제난 연구", 서울대 국사학과, 한국사론, 1987
첫째 민란의 공격대상이 부패한 지방수령이나 향리이었던 것에 반해 이필재의 난은 조선왕조자체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둘째 민란이 일반적으로 자연발생적이었던 것에 반해 이필제의 난은 당시 정세를 파악하고 치밀한 사전계획과 조직적이었다.
셋째 이필제의 난은 조선후기에 갑자기 표출된 난이 아니라 이전에 일어났었던 민중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이필제를 비롯한 난의 주동자들은 임술민란 이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구체적인 대항방법과 목표를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다.
넷째 이필제의 난은 고립적이고 분산적이었던 기존의 민란과는 달리 이를 극복하고 지역적인 연계성과 통일성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난이 일어난 지역이 진천, 진주, 영해, 조령 등지로서 거의 삼남지역에 걸치고 있고 실제로 난에 동원된 계층이 경기도, 강원도까지 이르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필제의 난은 지역적으로 확대된 민중항쟁으로의 발전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이필제의 난을 가능하게 했던 당시 시대적인 배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4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것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필제의 난은 전통적인 유교적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왕조의 권위에 대한 적극적인 도전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지향하였던 바는 아예 그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근대적인 개혁에 이르지는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즉, 이들은 조선사회 전반적인 측면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당시 봉건적 모순관계를 타파하기 위한 토지제도, 신분제도 등에 관한 구체적인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는데 있다. 이러한 한계는 그들의 출신성분과 그들이 받았던 교육의 측면이 원인이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결과적으로 이필제의 난은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이를 극복하려 하였으나 봉건적인식의 한계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이유로 이필제의 난이 과소평가되거나 부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필제의 난은 조선후기 민중항쟁에 있어서 질적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고 반봉건을 지향하고 조선왕조의 해체를 가속화시켰다는 점은 무시 못 할 것이다. 또한, 이필제의 난은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갑오농민전쟁으로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6. 결론
지금까지 이필제의 난이 일어났던 시대적 배경과 이필제의 생애, 난의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이필제란 인물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19세기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혼란과 각계층간의 대립과 같은 대내적인 요인과 서구열강들의 침입에 대한 위기의식은 조선민중들의 불안감과 불만을 증폭시켰고 빈번한 민란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민중항쟁의 흐름 사에서 4차례에 걸쳐서 일어난 이필제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19세기 후반의 민중항쟁과 전반의 민중항쟁의 과도기적 위치에 서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기존의 고립 분산적이고 산발적인 민란의 한계를 벗어나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난을 일으킴으로서 이후 갑오농민전쟁으로의 발전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비록 완전한 반봉건의식이 자리 잡지 못한 한계도 있지만 이필제의 난을 통한 민란의 질적 발전과 반봉건적 정신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 부록 : 19세기의 대표적 사건
1811년 (순조 12)년 12월 평안도 농민전쟁(平安道 農民戰爭) 일어남.
1814년 (순조 13)년 제주도에서 민란 일어남.
1862년 (철종 13)년 2월 진주 민란 일어남.
1863년 (철종 14)년 11월 동학교주 최제우(崔濟愚) 체포됨.
1863년 12월 고종(高宗)즉위 : 흥선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정권을 장악.
1866년 7월 제너럴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 발생.
1866년 9월 병인양요(丙寅洋擾) 발생.
1871년 (고종 8)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발생.
1875년 (고종 12)년 운요호사건 발생.
1882년 6.9 임오군란(壬午軍亂) 발생.
1884년 (고종 21)년 10.7 갑신정변(甲申政變) 발발.
1885년 3.1 거문도 사건(巨文島事件) 발발.
1892년 (고종 29)년 11.1 동학교도 삼례 집회(參禮集會)를 개최.
1893년 (고종 30)년 3.11 동학교도 보은 집회(報恩集會)를 개최.
1894년 3.21 농민군, 고부 백산에서 봉기.
1894년 4.6-7 농민군, 황토현에서 관군과 보부상의 연합부대를 물리침.
1894년 6.25 갑오개혁(甲午改革) 시작.
1894년 6-7월 농민군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안(廢政改革案)을 실시.
1894년 9.13 농민군 2차 봉기(農民軍二次蜂起).
1894년 11.28 전봉준(全琫準), 전라도 순창에서 체포됨.
1895년 8.20 을미사변(乙未事變) : 명성황후(明星皇后) 죽음.
1898년 3.10 독립협회, 서울 종로에서 만민 공동회 개최 : 열강의 이권탈 철회를 주장.
1901년 (고종 38)년 5.28 제주도 대정군에서 이재수의 난(李在守亂) 발생.
1903년 (고종 40)년 5.25 용암포 사건(龍巖浦事件) 발생.
1904년 (고종 41)년 2.23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체결.
1905년 11.17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1907년 8월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봉기 : 정미의병(丁未義兵).
1907년 12.6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 결성.
1909년 (고종 46)년 10.26 안중근(安重根) 이토 히로부미 사살.
참고문헌
연갑수, "이필제 연구", 동학학보, 2003
한윤희, "이필제난의 고찰", 영남대 교육대학원, 2000
윤대원, "이필제난의 연구", 서울대 대학원, 1984
윤대원, "이필제난 연구", 서울대 국사학과, 한국사론,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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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7.31
  • 저작시기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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