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일본의 대외정책에 대한 고찰과 평가 및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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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19세기 일본의 근대화 과정
1) 쇄국에서 개국으로
(1) 서양 열강에 의한 개국
(2) 에도막부의 붕괴
2) 메이지 유신
3) 메이지 유신에 대한 평가

3. 19세기 일본의 동북아 정책.
1) 지리적 상황이 일본 외교 정책에 미치는 영향
2) 19세기 동아시아 질서
3) 일본과 중국(淸)
4) 일본과 조선
5) 일본과 러시아

4. 일본의 대중국 정책
1) 진출을 위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
(1) 청.일의 활발한 조선경제침략
(2) 일본의 조선에서의 음모: 중일전쟁-타이완할양(1867년-1895년)
2) 일본의 자원을 위한 중국과의 관계

5. 19세기 일본의 동북아 정책의 평가중국근현대사

본문내용

책봉과 조공으로 상징되는 상하관계 혹은 군신관계에서 벗어나 각 국은 대등하다고 하는 만국공법적인 근대관계로 전화하는 데 중요한 계기였다.
그러나, 1832년과 1845년 영국이 조선과의 통상을 시도했을 때 조선과 청의 입장은 조선은 독립국이 아닌 조공국, 즉 속국이므로 스스로 통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조선과 통상이 가능한지 타진한 것이었을 뿐, 종속관계에 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1860년대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청은 1866년에 프랑스, 1871년에 미국과 일본, 1873년에 일본과 각각 종속관계에 대한 논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1875년 일본이 운양호사건을 일으키고 무력으로 조선을 개국시키려 하면서 종속관계 논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876년 한일수호조약이 맺어지면서 종속관계를 둘러싼 논쟁에도 변화가 나타나서 이제 조선과 일본이 직접 이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조선이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도록 청이 주선하면서 사정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조선이 이 논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이전과는 다른 변화였다. 일본은 ‘자주지방’을 ‘독립국’으로 해석하여 조선이 더 이상 청의 속국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완성된 무역장정을 통해 양국의 종속관계는 ‘묵인’에서 ‘명시’로 전환되고 이를 발판으로 청의 간섭이 심화되었지만, 아직은 ‘자주적 내치·외교’라는 ‘형식’을 유지하며 ‘실제’를 위장했던 것이다.
청의 개입에 불만을 품은 일본 및 친일세력은 세력만회를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 후 민씨 일파의 청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심해졌으며, 청은 각 분야에 대한 종속을 보다 강화하려 했다. 청은 조선의 자주권을 노골적으로 침해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양국의 종속관계는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종속관계는 조공·책봉·반력 등의 의례를 통한 중화체제의 인정, 그리고 속방의 ‘자주적내치·외교’가 그 핵심이었다.
이렇게,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은 양국의 종속관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갑신정변이 청병의 신속한 개입으로 말미암아 좌절되고,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청의 입지는 한층 굳어졌다. 그 해 베트남을 프랑스에 빼앗긴 청에게 조선은 유일한 속국이었고 그만큼 관심도 커졌다. 청은 적극적으로 조선이 내치·외교에 간섭허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조선의 자주권도 종종 무시되었다. 따라서 양군의 종속관계도 변질되었다. 즉 청이 조선의 자주권을 공공연히 침해하고 내치·외교에 간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에 대해서는 1871년 조약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양국간의 교역을 열었지만-일본은 중국에서 서양 열강과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고자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이후 몇 년간은 의견 차이로 중단되고 말았다.
조선 문제는 1873년 열광[정한론]이 있고 나서 예상되었던 것보다 훨씬 논쟁적이 되었다. 1888년에 출간한 [정한론]은 청의 대조선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양국 사이의 종속관계를 부정했다. 이 책에서는 조선은 청의 ‘조공국’일 뿐이지 결코 ‘종속국’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심지어 종속관계 명시의 진실성 여부까지도 의심하고 있다. 유장근 하정식 엮음, 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모, 혜안, 2002
이렇게 19세기 후반이 되면 일본과 중국(청)의 대립이 조선을 사이데 두고 갈등이 나타난다. 대륙에 위치한 중국(청)과 해양 국가였던 일본 사이에 있던 한반도(조선)는 두 국가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조선)가 당시 중국의 세력 아래 놓인 유일한 속국이었기 때문에 지키려 노력했고, 일본의 입장에선 조선이 대륙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기 때문에 이를 차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청·일 전쟁의 발발 원인은 1894년 5월 조선에서 발생한 갑오농민전쟁이 시발점이 되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이 이를 무력으로 제압하려는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근대적 지휘 방법과 우수한 무기에 힘입어 청·일 전쟁에서 승리를 이룩한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청에 승인시킴으로써 중국(청)의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증가시키게 된다.
5. 19세기 일본의 동북아 정책의 평가
19세기의 동북아는 중국의 화이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국제관계가 조공관계로 형성되어있었다. 수직적인 국가관계 아편전쟁의 전후 처리 문제 해결을 위한 조약인 남경조약을 통해서 국가 간의 대등한 관계가 처음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여전히 동북아 국가들은 외국에 배타적인 쇄국정책을 취한다. 서양의 국가들은 자원의 확보와 시장의 확대 그리고 선교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동북아 국가의 문호 개방을 요구한다. 결국 무력을 이용하여 불평등한 조약으로 중국은 문호를 개방한다. 일본은 페리제독의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계기로 문호를 개방한다. 일본정부라기보다는 한 개인이 맺은 이 조약을 통해서 남보다 일찍 문호를 개방하고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기에 조선보다 먼저 산업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일본 또한 시장과 자원 확보를 위해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으며 강화도 조약을 통하여 조선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는다. 강화도 조약을 통해서 조선으로부터 많은 이권을 얻는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뿐만 아니라 남만주에게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게 된다.
19세기 동양은 서양문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내재화 시키느냐에 따라서 판이하게 달라졌다. 일본은 개국한 반면, 조선과 청은 쇄국정책을 고집했다. 결국 일본은 동북아의 강국이 되었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청은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의 패하게 됨으로써 서양의 식민지가 된다. 이렇듯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역사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김용구 저, 세게외교사 전정판, 서울대학교, 1999
W.G 비즐리 지음, 강인성 옮김, 일본 근현대사, 을유문화사, 2004
박진우 외 공저, 일본 근현대사, 좋은날, 1999
유장근 하정식 엮음, 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모, 혜안. 2002
박경희, 일본사
연민수, 일본역사
박영재 외, 19세기 일본의 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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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8.30
  • 저작시기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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