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과 소론의 갈등 -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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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노론과 소론의 갈등 -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을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붕당정치의 전개

Ⅲ. 서인분열에 관한 여러 의견

Ⅳ. 노론과 소론의 대립
1). 송시열과 윤증
2). 회니시비

Ⅴ. 나오며

본문내용

1686년 경신환국이 있었던 다음해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쓴 글인 신유의서(辛酉擬書)로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송시열의 학문은 그 근본이 주자학이라고 하나 기질이 편벽돼 주자가 말하는 실학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송시열의 존명벌청(尊明伐淸)은 말로만 방법을 내세울 뿐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즉, 윤증은 그동안 송시열이 전념한 존명벌청의 의리가 구체적으로 하나도 이룩한 것이 없이 오로지 밖에 나타난 것은 그의 관직이 높아져 이름만 세상에 넘치고 있다고 하였다. 윤증은 이 의서를 먼저 박세채에게 보여줬는데, 박세채가 보내지 말라고 강권해 일단 송시열에게 보내지 않았다. 한데 송시열의 손자이자 박세채의 사위인 송순석이 박세채 집에서 의서를 몰래 가져가 송시열에게 전했다. 송시열은 크게 화를 내며 치를 떨었다.
이상과 같이 송, 윤의 대립과 윤증의 배사론이 대두된 후 회니시비에는 또 한가지의 배사론이 첨가되었다. 그것은 이미 송, 윤 양인이 모두 죽은 뒤 그들 당인들에 의하여 제기되어 회니시비를 보다 깊은 수렁으로 몰아 넣고 말았다. 그 사건은 「家禮源流」라는 禮書의 찬자(撰者) 시비와 그 간행문제에서 발단하였다. 「가례원류」는 윤선거와도 친숙하고 또한 윤증의 스승도 되는 유계가 김장생에게서 배운 예학을 발전시킨 책이다. 집필 과정에서 윤선거의 도움을 받았던 유계는 생전에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윤증에게 초고를 넘기고 교정과 간행을 부탁하며 세상을 떴다. 하지만 윤증은 「가례원류」를 유계와 윤선거가 공동으로 집필했을 뿐더러 김장생의 「가례집람」과 별 차이가 없다며 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계의 손자 유상기는 윤증 말년부터 간행을 독촉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유상기는 윤증 사후에 「가례원류」초고본(草稿本)을 가지고 노론 재상에게 부탁하여 조정에서 간행하게 되었다. 결국 이 책은 윤증이 죽고 난 뒤에야 비로소 햇빛을 봤다. 이때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는 윤증이 스승의 유언을 저버린 채 공동편찬이란 간사한 말을 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가례원류」가 노론측의 말대로 유계의 단독 찬술물인지 혹은 윤증의 말대로 윤선거와의 공동 편찬인지는 현존하는 상반된 주장의 문헌만으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생긴 이후 윤증은 앞서 스승인 송시열을 배반한 불의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다시 스승인 유계를 배반한 不義人으로 지목되어 회니시비에 있어서 두 가지 배사론이 겹치게 되었다.
Ⅴ. 결론
회니시비는 조선후기 당쟁사의 한 특색을 이루는 노소당쟁의 중요논점이며 명분론이었다. 그러나 회니시비의 논점과 명분은 그 내용을 분석하면 해석여하에 따라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도 있고, 한편 도저히 그 시비를 가리기 어려운 측면을 포함하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보다 중요한 과제는 노소분당과 그를 이은 노소당론에서 왜 이와 같은 회니시비를 앞세워 전개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노소당인들은 인조반정 이후에 대체로 다 같은 서인이면서도 변화하는 역사적 조건과 사회적 현실속에서 파생되는 대청외교관계를 비롯하여 국가의 재정회생과 사회의 민생안정, 정치의 西南黨爭 등 여러 분야에서 적출 되는 당면과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현실면에서는 이와 같은 당면과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따라 이를 극복할 논리와 방법을 달리하는 政見이 제시될 수 있었다.
회니시비는 이와 같은 상반된 입장에서 제기되는 구체적 정치경론과 그 정견들을 뒤에 감추고, 표면에 나타난 노소분당의 중심인물인 송시열과 윤선거 부자간의 자기합리화를 위한 이념논쟁에서 비롯되었다. 그 이념 논쟁의 논점과 명분의 중요한 내용이 바로 앞에서 논술한 회니시비의 논점과 명분론이었다. 그리하여 時局觀과 政見을 달리하는 서인당인에게는 자체 분열이 일어나 노소분당이 생겼고 그들은 회니시비를 보다 확대, 격화시켜서 끝없는 논쟁을 이끌어 갔다. 그 이유는 회니시비의 이념논쟁을 이기지 못한다면 자기편의 학문과 정견의 기반을 상실하여 정치적 몰락을 초래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회니시비가 사림간의 논쟁에서 확대되어 정계에 비화 본격적으로는 당론화된 시기는, 보는 이의 견해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송시열이 찬술한 윤선거의 묘비시비와 윤증의 신유유서의 노정으로 윤증의 背師論이 사림간에 시비화 된 직후인 숙종 9년(1683)전후로 인식되어 있다.
이로부터 노소당쟁에서는 그들간에 대립되는 학문, 사상과 시국관의 차이에서 나타난 정견대결의 실체는 가리워진 채 논점과 명분론을 부각시키는 회니시비와 같은 이념대립만이 정계를 주도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 결과 회니시비는 당사자인 송시열과 윤선거 부자가 모두 죽은 후에도 이를 계승하는 당인들이 노소가 분열되어 격렬한 당론을 벌였던 17세기를 넘기면서도 끝을 맺지 못하고 이어 경종, 영조, 정조기에 해당하는 18세기의 노소당쟁의 시기로 넘어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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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9.19
  • 저작시기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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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1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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