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문화권과 서양 문화권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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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야소회와 마테오리치
1. 기독교의 중국 전래
1) 경교(景敎
2) 제수이트들의 동아시아 선교 활동
3) 마테오리치의 중국 방문
4) 전례문제(典禮問題)와 기독교 선교 금지
2. 자명종과 소현세자
1) 소현세자의 비극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4) 이승훈의 개종과 천주교 박해
5) 실학 사상의 발흥

동양 문화권과 서양 문화권의 교류(4)
1. 은이냐, 아편이냐
2. 홍콩과 마카오
1) 홍콩의 역사와 문화
(1) 홍콩의 초기 역사
(2) 서양과의 첫 접촉
(3) 영국 식민지 시대
(4) 1997년 이후의 홍콩
2) 마카오의 역사와 문화
(1) 포르투칼의 마카오 점령
(2) 동서문화교류와 마카오
(3) 마카오 반환 의미 및 전망

본문내용

고 있다. 여기서는 광동어를 위주로 포르투칼어와 영어 북경어 등이 사용되고 있다.
인도 항로를 발견한 포르투갈이 1511년 말라카를 공략한 직후 포르투갈 사람 안토니오 데 아부레우의 선대(船隊)가 향료 제도로 향하였다. 그가 귀착(歸着)한 뒤 1513년에는 중국과 자바에도 선대가 파견되었다. 1521년에는 마젤란 선대가 향료 제도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에스파냐가 필리핀 식민지 건설에 주력하고 있는 동안에, 포르투갈은 동아시아 무역체계 확립에 힘쓰고 있었다.
포르투갈인은 1550년대로부터 마카오에 동아시아 무역의 근거지를 세우게 된다. 마카오는 원래는 광동성 향산현[香山縣]에 속해 있었다. 1553년 포르투갈인들은 물에 젖은 화물을 말린다는 구실을 내세워 처음 마카오에 발을 들여놓은 후 1557년 중국 관리자들에게 뇌물을 주고 마카오반도의 거주권을 획득하였다. 포르투갈은 1553년 대 중국 무역권을 획득하는 것과 동시에 마카오의 실질적인 사용권을 인정받고, 광동의 중국 관리로부터 도시 건설 허가를 얻었다.
1833년 동인도회사의 중국무역 독점권이 폐지된 후, 네이피어는 1834년 초대 중국무역 수석 감독관으로 임명받아 중국 무역의 보호 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마카오에 도착,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어 광동에서 영국의 중국무역 보호 촉진에 노력하였으나 중국의 반대에 부딪쳐, 그 대책에 고심하다 마카오에서 병사하였다.
아편전쟁으로 홍콩이 영국 식민지가 된 후, 아시아에서의 세력유지에 혈안이 된 포르투갈은 아오먼 반도 전역과 타이파, 콜론 두 섬을 점령하고, 식민지 건설을 합법화하는 조약을청나라와 맺었다. 이후부터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
마카오는 1951년 포르투갈의 헌법 개정에 따라 '해외주(海外州)'로 바뀌어 본국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포르투칼 총독이 통치하게 되었다. 1966년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일어나 마카오 정부와 현지의 중국인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2) 동서문화교류와 마카오
마카오는 서양문물이 아시아로 전파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로마 교황이 포르투갈 정부의 후원으로 그 곳에 마카오 관구를 설립하였다. 이에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대 아시아 진출을 위한 거점이 되는 동시에 1841년 영국이 홍콩에 식민지를 개설하기까지 중국과 서양의 유일한 교류기지가 되었다.
마카오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진 문물은 그리스도교 외에 서양에서 발달한 천문학, 유클리드 기하학, 근대적인 지도투영법, 대포주조기술 등이 있고, 특히 동 서양의 지리적 지식교류에 커다란 역할을 한 마테오 리치도 마카오를 거쳐서 중국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래서 마카오에는 오늘날에도 가톨릭교도가 많고, 또 많은 그리스도교의 학교 병원 사회시설 등이 있다.
마카오라는 지명의 기원이 된 항해의 수호신 천후원군(天后元君)을 모시는 마가오묘를 비롯하여 관음묘(觀音廟)와 캉궁묘(康公廟) 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전통적 신앙이나 행사도 그대로 전래되고 있다. 관음묘 마당의 원형 테이블은 1844년 청 미조약이 조인된 테이블로 유명하다. 유럽 문화와 중국 문화의 뒤섞여 있는 거리의 모습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돌을 깐 길이나 남 유럽풍의 주택과 한자 간판을 내건 상점가가 서로 이웃하고 있다. 그리고 1890년에 손문(孫文)이 의료 생활을 한 장소는 손문기념관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金大建)이 16세 때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신학교에서 서양문물을 배운 곳이기도 하다.
(3) 마카오 반환 의미 및 전망
마카오가 홍콩에 비해서 세계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에, 세계 언론기관들의 관심도 홍콩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반환은 중국이 서세동점의 굴욕적 역사를 완전히 청산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마카오는 1999년 12월 20일 중국에 정식으로 반환되어 홍콩에 이어 두 번째로 중국의 특별행정구가 되었다.
중국은 지난 97년 7월 홍콩을 되찾은 데 이어 이번에 마카오가 442년 만에 식민지 역사를 끝내게 됐다. 중국은 향후 마카오 통치 정책으로 '일국양제', '마카오인에 의한 통치'. '고도자치', '기존체제 50년간 불변' 등 4가지 기본 원칙을 설정했다.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고는 마카오 행정청이 마카오를 자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홍콩 통치 방법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입법 사법 행정 등 모든 분야에서 대륙의 입김을 최소화하겠다는 구상이다. 마카오인들은 이 같은 중국의 정책을 그대로 믿고 있다. 중국의 홍콩 정책 사례가 큰 힘이 됐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생활이나 생업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반환이 이뤄진 후의 치안문제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중국 당국과 마카오 흑사회(지하 폭력조직)간에 충돌이 생길 경우 상당한 혼란이 올 수도 있다는 우려다.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삼합회(트라이어드)의 본거지가 마카오다. 마카오 주민들의 생활에 깊숙이 뿌리내린 이들을 완전 소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양측 대립 때문에 사회가 불안해지고 관광객들이 줄어든다면 마카오인들이 중국을 멀리하려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최근 수년동안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마카오 경제를 어떻게 일으킬지도 중국으로서는 고민이다. 중국은 마카오의 기존 경제·산업 체제를 유지하면서 반환에 따른 중국 경제와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중국은 특히 마카오를 주하이(朱海) 시아먼(厦門) 선전(深玔) 등 남부 경제 특구를 잇는 주장 삼각지 개발의 기폭제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그러나 홍콩의 경제전문가들 중에는 마카오 경제가 중국의 생각처럼 빠른 시일 내에 활력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마카오의 매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다. 개혁 개방 초기였다면 자유 경제 체제 마카오가 중국 투자의 창구로 활용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서방 투자가들이 마카오를 외면하고 직접 중국 대륙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어쨌든 마카오는 중국이 21세기의 초강대국으로 등장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또 한번의 무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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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9.29
  • 저작시기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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