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문화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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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당왕조의 문화적 배경

Ⅱ.당의 문학

Ⅲ.당의 종교

Ⅳ.당의 역사학(歷史學)

Ⅴ.당의 회화 -미술

Ⅵ.당의 서화(書畵)․조각(彫刻) 등의 미술

Ⅶ.당의 음악

Ⅷ.과학기술
1)천문과 역산
2)의학
3)조판 인쇄술 발달

본문내용

주변 나라 사람들이 빈번하게 내왕했다. 당나라의 장안은 현종 때 최성기를 맞이하여 인구가 100만이 넘는 국제적 문화도시였으나 당나라가 쇠망하자 함께 쇠퇴하여 다시는 국도(國都)가 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일개 지방도시에 불과한 존재로 있었다. 그 뒤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으로 다시 부흥하여, 산시성의 성도 시안으로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은 철저한 계획으로 지어진 도시이다. 쭉뻗은 도로망과 각종 가옥들을 적절하게 배치한 당시로서는 세계최고의 도시였다.
이러한 당의 수도를 본따서 만든 나라는 발해로서,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는 곧게 뻗은 도로망과(주작대로) 바둑판식의 가옥배열로 볼때 장안성을 모델로 했음이 확실하다.
또한 일본 나라시대의 수도인 헤에조오쿄오(平城京(평성경))도 장안성을 모델로 세워졌다고 한다
장안(長安)은 동서로 10km, 남북으로 9km 정도의 규모였다. 현재 우리가 보는 서안(西安)의 성곽은 원래 장안(長安) 규모의 1/8에 불과한 것이다. 아울러 지금도 하기 힘든 도시계획을 철저히 시행하여 건물을 배치했는데, 장안(長安) 전체를 110개 직사각형 구역으로 나누어 반듯하게 수도를 건설했다. 이와 함께 남북으로 폭 1.8km에 이르는 고속도로를 건설하여 각종 기마(騎馬)와 교통도구들이 질주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이 정도의 규모와 사전 설계에 의한 수도 건설은 아마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기록이었을 것이다.
[당시 당나라 수도 장안의 도시구획도. 정방형으로 불록을 정한 도시계획]
대당제국에 조공(朝貢)을 바치고자 각국 사절단들이 운집했던 수도 장안(長安)은 각종 기이한 복장이 길을 뒤덮어 장관을 이루었다. 중서시랑(中書侍郞) 안사고(顔師古)가 정관(貞觀) 3년(629년) 화가들을 불러 이러한 성황(盛況)을 기록하겠다는 상소를 올렸으며, 그 결과 화가들이 이러한 성황(盛況)을 묘사하여 <왕회도(王會圖)>를 남겼다.
그후 대당제국의 멸망까지 페르시아 사절단이 10차례 입국했으며, 특히나 일본의 견당사(遣唐使)는 그 규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처음에는 한번에 보통 3~5백명 수준이었으나 그 후 한번에 2천명 규모로 불어났다. 물론 사절단의 인솔단장 부단장 이외에도 유학생들과 학승(學僧)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일부는 당시 중국이 좋았는지 임무를 마치고도 귀국하지 않은 채 그대로 눌러앉아 몇십 년을 유학(?) 하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귀국 후 대당제국의 법령제도를 모방하여 자기 나라의 법령을 정비했다. 대당제국의 균전제(均田制)는 일본의 반전(班田)으로 변했다. 현재 일본의 경도(京都)는 바로 당시 장안(長安)의 도시를 본떠 건설한 것이다. 규모가 대폭 줄어들었고 또한 원래 계획에 따라 그대로 건설되지 못했을 뿐 그 모양은 장안(長安)을 그대로 옮겨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장안(長安)의 주작문(朱雀門) 거리는 바로 나라(奈良)과 헤이안(平安)의 남북 치도(馳道/고속도로)가 모방한 것인데 이름도 그대로 주작대로(朱雀大路)라 붙였다.
예빈도(禮賓圖) 벽화 예빈도는 당고종과 무측천사이에서 태어난 여섯째 아들 이현이 묻힌 묻힌 묘도(장회태자묘)의 동쪽에 그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왼쪽에 세명(당나라 관리)이 아니라 오른쪽에 그려진 세명에 주목해야 하는데 좌우에 두명중 대머리, 높은 코와 깊은 눈을 가진 사람은 서역인이거나 로마인이고 털모자, 털바지와 망토를 걸친 사람은 북방 유목민의 모습이다. 가운데 헐렁한 바지에 통소매를 입고 두개의 깃털을 꽃은 모자를 쓴 사람은 바로 한반도에서 간(신라,고구려,백제) 사절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를 보면 당대에 많은 외국인이 장안에 온걸로 추측을 할 수 있는데, 등지성(鄧之誠)의 분석에 의하면 대당제국과 접촉한 나라는 모두 48개국에 이르는데, 그중 조공(朝貢)을 바친 나라는 29개국, 국토를 바친 나라는 6개국, 귀속된 나라는 5개국 등에 이른다는 통계를 내놓았다. 이 정도면 당나라가 어느 정도의 국력을 과시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신채식 저,『동양사개론』,삼영사, 1993
서연달,오호곤,조극요, 중국사연구회 옮김,『중국통사』,청년사, 1989
부락성,신승하 역,『중국통사(하)』,지영사, 1981
노태돈 저,『예빈도에 보인 고구려』,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공상철 저,『중국, 중국인 그리고 중국문화』, 다락원, 2001
변성규 저,『중국문화의 이해』, 학문사, 2003
나카무라 고이치 저,『한시와 일화로 보는 꽃의 중국문화사』,뿌리와 이파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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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9.29
  • 저작시기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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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14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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