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고구려의 도읍지 '집안' 의 유물로서의 중요성
2. 당시 대외관계를 알려주는 자료로서의 중요성
1.역사왜곡에 대응할 중요성
(1) 일본 사학계의 "고대 남조선경영론(임나 일본부설)"이 근거를 잃게 됨
(2) 중국의 동북공정을 학술적으로 제지
2.서예사적 의의
3. 고구려의 지리적 위치의 증거
4. 당시 사회상에 대한 역사적 사료로서 중요성
4. 기타 국내 역사적 해석 능력의 탁월 증거
2. 당시 대외관계를 알려주는 자료로서의 중요성
1.역사왜곡에 대응할 중요성
(1) 일본 사학계의 "고대 남조선경영론(임나 일본부설)"이 근거를 잃게 됨
(2) 중국의 동북공정을 학술적으로 제지
2.서예사적 의의
3. 고구려의 지리적 위치의 증거
4. 당시 사회상에 대한 역사적 사료로서 중요성
4. 기타 국내 역사적 해석 능력의 탁월 증거
본문내용
신왕의 항복을 받아낸 뒤 왕제(王弟)와 대신(大臣) 10인을 비롯한 포로 1,000명을 얻어 돌아왔다. 이 작전의 대상지역은 대개 임진강 하류, 한강 하류 일대로 비정된다. 비문은 여기서 영락 6년조를 적기 전에 그간의 경위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신묘년 기사로서 영락 6년에 이루어진 작전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다음 영락 8년(398)에 왕은 소규모 군사를 보내 식신토곡(息愼土谷)을 관(觀)하고 부근의 가태라곡(加太羅谷) 등에서 남녀 300명을 얻었고, 이후 이 지역으로 하여금 조공하게 했다. 이 식신은 숙신(肅愼)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 지역은 만주의 영안(寧安)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이를 2개의 작전으로 나누어보고 강원도 일대의 예(濊) 및 신라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영락 10년(400)조는 문자의 탈락이 심하여 이설이 많으나, 신라 구원을 위해 보기(步騎) 5만을 파견해 임나가라(任那加羅)까지 가서 왜를 토멸한 것이 주내용이다. 여기서도 영락 10년 작전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즉 영락 9년에 백제가 이전의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여 왕이 평양에 내려왔을 때 신라 사신이 구원을 요청하여 밀계(密計)를 약속했다. 따라서 영락 10년의 작전은 그 밀계에 따른 것이었고, 신라왕은 이를 계기로 직접 고구려에 조공했다. 영락 14년(404)조는 백제군을 따라 대방계(帶方界:황해도)에 침입한 왜를 궤멸시킨 기사이다. 고구려의 왕당(王幢 : 친위군)이 길을 끊고 사방에서 추격하여 무수한 적을 참살하여 궤멸시켰다. 영락 17년(407)조는 문자의 탈락이 심해 구체적인 실상을 알기 힘들다. 고구려군은 적군을 섬멸하여 개갑(鎧甲) 1만여 개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군수품을 얻었고, 돌아오는 길에도 많은 성을 격파했다. 이 작전을 보기(步騎) 5만을 보내 후연(後燕)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백제를 공격한 내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락 20년(401)조는 동부여(東夫餘) 정벌기사이다. 비문에 따르면 동부여는 이전에 추모왕(鄒牟王)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조공을 끊어버리고 반항한 것에 대해 왕이 직접 토벌하자 곧 투항하고 말았다.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은택(恩澤)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 동부여는 두만강 하류에 있는 부여족의 일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훈적을 적은 끝부분에서 비문은 왕이 공파한 성이 64개, 촌이 1,400개였다고 적고 있다.
가 적혀 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19대왕으로서 재위 391∼412동안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재위 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으며,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켜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開原)∼영안(寧安), 동으로는 훈춘(琿春),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렀다. 대왕은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재정비하였으며, 393년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아들 장수왕 때 단행되는 평양 천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비석이 광개토대왕비이다. 이 비석은 사면석 비(四面石 碑)로서 높이가 약 6.39m인데,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동쪽 국강상(國岡上)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워졌다.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서문격으로 제1면 1행에서부터 1면 6행에 걸쳐 추모왕(鄒牟王 : 주몽)의 건국 신화를 비롯하여 대주류왕(大朱留王 : 대무신왕)으로부터 광개토왕에 이르는 대왕의 세계(世系)와 약력 및 비의 건립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비문의 핵심을 이루는 2부는 제1면 7행에서부터 3면 8행에 걸쳐서 대왕의 정복 활동과 토경순수(土境巡狩) 기사가 연대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제3부는 제3면 8행에서부터 4면 9행에 걸쳐서 능을 지키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의 명단과 수묘지침 및 수묘인 관리규정이 기술되어 있다.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된 정복 기사는 정토와 복속 및 토경순수라는 당대 고구려 정치사의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유기적 관련을 갖고 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전제왕권의 확립을 통한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3부는 광개토왕 생시의 명령에 근거하여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연호의 수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을 적은 부분으로 그 당시 고구려의 장례의 실상등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수묘인 관계기사는 비문의 후반부(3부)에 기록되어 있는데, 수묘인들의 출신지, 각 지역별 호수 배당, 수묘인의 매매금지조항 등의 내용이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구민(舊民)이 약해질까 우려해 직접 약탈해온 신래한예(新來韓濊)로 하여금 수묘토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장수왕은 구민 110가(家), 한예 220가를 차출하여 국연(國烟) 30, 간연(看烟) 300으로 모두 330가의 수묘가를 책정해 능을 관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선왕(先王) 이래 묘 위에 비를 세우지 않아 수묘인 연호의 관리에 차질을 빚었는데, 이제 묘비를 세우고 수묘연호를 새겨 착오가 없게 함과 아울러 수묘인의 매매를 금지시키고 위반자를 처벌하게 했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적 성격 등 사회사연구에 중요하다.
4. 기타 국내 역사적 해석 능력의 탁월 증거
우리 한국의 역사학자들의 역사적인 증명능력이 월등하다는것을 증명해준사례입니다.
잃어버린 역사라고 대표되는 시대인 백제시대의 역사도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의해 한국 학자들의 능력이 증명된것처럼 광개토대왕릉비역시 한국 학자들의 능력을 증명해주는 그러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수왕이 광개토왕비를 세운 의도와 비문의 해석에는 아직도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우리가 흔히 관심을 같는 것은 1775자의 광개토대왕비문중에서 32자의 해석에만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그 내용은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身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이왜이신묘년래도?파백잔??신라이위신민)이다.
가 적혀 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19대왕으로서 재위 391∼412동안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재위 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으며,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켜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開原)∼영안(寧安), 동으로는 훈춘(琿春),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렀다. 대왕은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재정비하였으며, 393년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아들 장수왕 때 단행되는 평양 천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비석이 광개토대왕비이다. 이 비석은 사면석 비(四面石 碑)로서 높이가 약 6.39m인데,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동쪽 국강상(國岡上)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워졌다.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서문격으로 제1면 1행에서부터 1면 6행에 걸쳐 추모왕(鄒牟王 : 주몽)의 건국 신화를 비롯하여 대주류왕(大朱留王 : 대무신왕)으로부터 광개토왕에 이르는 대왕의 세계(世系)와 약력 및 비의 건립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비문의 핵심을 이루는 2부는 제1면 7행에서부터 3면 8행에 걸쳐서 대왕의 정복 활동과 토경순수(土境巡狩) 기사가 연대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제3부는 제3면 8행에서부터 4면 9행에 걸쳐서 능을 지키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의 명단과 수묘지침 및 수묘인 관리규정이 기술되어 있다.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된 정복 기사는 정토와 복속 및 토경순수라는 당대 고구려 정치사의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유기적 관련을 갖고 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전제왕권의 확립을 통한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3부는 광개토왕 생시의 명령에 근거하여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연호의 수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을 적은 부분으로 그 당시 고구려의 장례의 실상등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수묘인 관계기사는 비문의 후반부(3부)에 기록되어 있는데, 수묘인들의 출신지, 각 지역별 호수 배당, 수묘인의 매매금지조항 등의 내용이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구민(舊民)이 약해질까 우려해 직접 약탈해온 신래한예(新來韓濊)로 하여금 수묘토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장수왕은 구민 110가(家), 한예 220가를 차출하여 국연(國烟) 30, 간연(看烟) 300으로 모두 330가의 수묘가를 책정해 능을 관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선왕(先王) 이래 묘 위에 비를 세우지 않아 수묘인 연호의 관리에 차질을 빚었는데, 이제 묘비를 세우고 수묘연호를 새겨 착오가 없게 함과 아울러 수묘인의 매매를 금지시키고 위반자를 처벌하게 했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적 성격 등 사회사연구에 중요하다.
4. 기타 국내 역사적 해석 능력의 탁월 증거
우리 한국의 역사학자들의 역사적인 증명능력이 월등하다는것을 증명해준사례입니다.
잃어버린 역사라고 대표되는 시대인 백제시대의 역사도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의해 한국 학자들의 능력이 증명된것처럼 광개토대왕릉비역시 한국 학자들의 능력을 증명해주는 그러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수왕이 광개토왕비를 세운 의도와 비문의 해석에는 아직도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우리가 흔히 관심을 같는 것은 1775자의 광개토대왕비문중에서 32자의 해석에만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그 내용은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身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이왜이신묘년래도?파백잔??신라이위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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