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광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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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인 김광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작품을 통하여 알아보는 광균(光均) 의 인생
1) 유년시절의 상실과 그리움
2)가족의 죽음을 접하면서 형성된 그의 죽음의식
(가) 아버지의 죽음 (나) 누이동생의 죽음 (다) 어머니의 죽음
3) 이미지즘의 기반
(가)김기림과의 만남을 통해 모더니즘에 눈뜨다
(나)젊은 시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안목을 넓히다
(다)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회화성에 빠져들다
4) 현대문명과의 만남
(가) 전기 (나) 기차
5) 현대문명에 대한 태도

2. 김광균(金光均) 의 삶의 흔적을 찾아서
◆출생과 자라온 환경◆
1) 출생과 유년시절
2) 아버지의 죽음과 방황
3) 상업학교 진학과 문학을 향한 열정
4) 군산에서의 생활, 그리고 결혼
5) 서울상경, 시작활동의 절정기
6) 동생의 납북과 사업가로서의 변신
7) 모친의 사망
8) 다시 문단의 세계로
9) 사망

3. 김광균(金光均)의 삶을 들여다본 후에..

본문내용

’라는 구락부식 단체를 조직하고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 단체는 약 1년을 존재하다가 김광균이 직장을 얻어 군산으로 내려가게 됨으로써 해산된다.
4) 군산에서의 생활, 그리고 결혼
1932년 상업학교를 졸업한 김광균은 1933년 경성고무공업주식회사의 사원으로 취직이 되어 10월에 군산 공장 근무를 위해 내려가게 된다. 그는 군산에서 회사업무를 하면서 더욱더 시작(詩作)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중앙 일간지에 연이어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22살 되던 해 함경남도 이원출신의 신부 김선희를 만나 결혼하고 고향인 개성으로 올라와 몇 달 동안 그 곳에서 신혼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개성에서 서너 달 보낸 이후 그는 다시 아내를 데리고 원근무지인 군산으로 내려가 공장에 복귀하고 더욱 창작 활동에 매진한다.
5) 서울상경, 시작활동의 절정기
그가 회사로부터 서울 본사 근무를 명 받고 군산에서의 생활을 정리하여 올라온 것은 1936년 봄의 일이다. 처음 다옥동에서 혼자 하숙을 하다가 어느 정도 기반이 서자 곧 군산에 있던 부인을 불러온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회사를 퇴근 한 후에 명동일대의 다방과 대폿집으로 향하여 당시 조선 문화 예술계의 젊은 시인, 화가들과의 안면을 넓혀간다.
1938년 초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그의 투고작<설야(雪夜)>가 시 부분 당선작으로 선정됨으로써 그는 정식 등단의 절차를 거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본격적인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때 받은 퇴직금으로 그는 아버지의 남은 빚을 다 청산하고 계동에 정식으로 집을 마련하여 가족들을 모두 서울로 불러온다. 그리고 남은 돈의 일부는 사업을 하던 동생에게 대주어 가족들을 부양하게 하고 자신은 본격적으로 시작(詩作)에 몰두한다. 이후 일제말기와 해방기를 거치는 동안 그는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게 된다.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는 <와사등>,<뎃셍>,<은수저>등이 모두 이시기에 발표된 것들이다.
6) 동생의 납북과 사업가로서의 변신
1950년. 6.25의 반발은 그의 불타는 창작열을 꺾어놓게 된다. 전쟁이 나고 서울이 함락된 후 사업을 하던 그의 동생이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서대문 감옥에 갇히게 되자 김광균은 928서울 수복이 있기까지 가족들을 돌보며 동생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결국 동생은 패주(敗走)하는 북한군들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서는 이후 다시 만나볼 수 없게 되었다. 동생의 납북으로 그는 그 후 30여년간 시단(詩壇)에서 떠나 사업가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그는 동생이 경영하던 사업체를 물려받아 집안 경제를 책임진다.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을 하면서 사업가로서의 변신을 시도한다. 이후 그는 6.70년대 고도 성장기에 자신의 사업체를 더욱 확장하였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인으로서 국제상위 한국위원회 감사와 한일경제특위 상임위원, 그리고 무역협회 부회장 등과 같은 굵직한 직책들을 차례대로 맡게 된다.
7) 모친의 사망
1961년 오래도록 병마에 시달리던 그의 모친이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친이 사망한 후 줄곧 고생하신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본 그에게 있어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 이것은 그의 시 <국화>,<수반(水盤)의 시>,<다시 목련>,<목련나무 옆에서> 등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또한 육남매를 키우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85년에 발표한 문집 제목을 어머니가 묻히신 와우산(臥牛山)으로 정한다.
8) 다시 문단의 세계로
동생의 납북이후 거의 중간하다시피 했던 문단활동을 1984년 『현대문학』지에 <야반>등 6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재개한다. 그리고 그는 건강을 염려하여 경영하던 사업체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하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그 이듬해 1985년에 문단의 원로들의 모임인 <회귀>의 동인으로 참가하여 창작활동에 힘을 기울인다. 그의 네 번째 시집인 『추풍귀우』가 발표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 후 그는 75세 되던 해 뇌혈전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약 5개월간의 투병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평소 종교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항상 종교를 갖는다면 카톨릭에 귀의하겠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로 카톨릭에 대하여는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투병하던 중 천주교 춘천교구장인 ‘장익’주교의 권유에 의해 카톨릭에 입문하게 된고 1989년 명동성당에서 영세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 해에 그는 생전의 마지막 시집인 『임진화(壬辰花)』를 출판하게 된다.
9) 사망
그는 결국 악화된 건강을 이기지 못한 태 1993년 11월 23일 결국 80세의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유해는 평소 그의 뜻을 따라 와우산 자락 어머니 무덤 곁에 안장되었다.
3. 김광균의 삶을 들여다본 후에..
한국 모더니즘 시의 기수, 신세대의 기수, 가장 성공한 이미지스트라는 숱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는 모더니스트가 아니다. 굳이 모더니즘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시작을 한 적이 없다. 물론 나의 시에는 시각적, 회화적인 이미지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오랫동안 서울에서 거주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김광균의 시는 철저한 모더니즘 이론에 입각하여 쓰여진 것은 아니다. 그의 시 세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당대의 다른 모더니스트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차별성을 창조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이미지스트이다. 그의 이런 독창적인 이미지스트의 기질은 그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김광균은 어린 시절 갑자기 찾아온 가족의 죽음과 함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런 그에게는 죽은 가족과 유복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내면 깊숙이에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런 면이 그의 시를 감상적으로 만드는 주 요인이 된다. 또한 김기림의 소개를 통해 만나게 된 화가들의 화풍이 그로 하여금 회화적인 시를 쓰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자신도 언급했다시피 김광균은 모더니즘을 의식하고 시를 쓰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회화적이고 도시적인 시를 쓰게 된 작가이다. 낭만적 이미지즘 시인 김광균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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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14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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