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윤식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시인 김윤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연혁

# 작품 및 경향

# 작품소개

■■ 해 석 ■■

내 마음을 아실 이

■■ 해 석 ■■

독을 차고

■■ 해 석 ■■

거문고

■■ 해 석 ■■

묘비명(墓碑銘)

■■ 해 석 ■■

# 이숭원씨의 김영랑論

# 김영랑 시인의 숨켜진 모습

본문내용

나의 정경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오롯한 미의 원광을 두르게 된다. 가령 영랑의 [오월] 같은 시는 봄 들판의 약동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인데 시각적 이미지를 적절히 구사하여 심미감을 높이고 운율의 변화를 통하여 흥겨운 율동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서정적 표현의 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우리 시의 역사에서 귀중히 간직하고 전수해야 할 표현 상의 백미(白眉)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판단한다. 맑고 깨끗한 자연의 정경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세계 표현 김영랑의 시에서 인생과 사회에 대한 발언이 중심을 이룬 작품은 아주 적다. 현실에 대한 반응을 보인 예로는 [거문고]라든가, [독을 차고], [우감(偶感)], [춘향] 등의 작품을 들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점 때문에 현실주의적 시각을 가진 사람은 김영랑의 시가 우리에게 어떤 효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앞에서 말한 [오월]처럼 자연의 정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일관한 작품은 그런 지적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만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는 관련이 없는 듯한 자연에 대한 상상도 우리의 감정을 풍요롭게 하며, 새로운 비유와 표현의 구사도 언어사용의 폭을 넓힘으로써 실제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자연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와 절묘한 기법으로 표현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김영랑의 시는 그 나름의 충분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 김영랑 시인의 숨켜진 모습
시인 김선태의 <영랑의 인간적 풍모>라는 글의 일부 영랑 김윤식은 1902년 강진의 5백석 지주 김종호의 장남으로 태어나 강진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와 휘문의숙을 거쳐 동경 청산학원 영문과를 중퇴했다. 1919년 휘문의숙 재학 때 독립선언문을 구두 안창 밑에 감추고 고향에 내려와 강진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검거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고, 1920년 동경 유학 시절 혁명가이자 무정부주의자인 박열과 같은 방에서 하숙하다가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김현구·차부진·김길수 등과 강진에서 《청구》라는 문학동인지를 발간하다가, 1930년 동경 유학 때 사귄 박용철과 함께 동인지 《시문학》 창간을 주도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대한독립촉성회 강진군 단장을 맡았고, 1948년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여 서울 성동구 신당동으로 이주, 1949년 8월부터 약 7개월간 공보처 출판국장을 역임했다. 1950년 6·25사변 발발로 복부에 파편을 맡고 쓰러져 9월 29일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위의 내용은 영랑 김윤식의 생애를 간추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약식 연보만으로는 김영랑이라는 시인의 참모습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그는 우리의 선입관과는 달리 여러 가지로 다른 면모를 지녔던 시인이다. 그래서 필자는 영랑생가를 찾는 답사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자료들을 종합하여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거나 잘못 알려져 있는 점 몇 가지를 소개하려 한다.
셋째, 그의 여성 편력에 관한 것이다. 그 당시 문인 치고 여성 편력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리요만 영랑은 다소 심했던 것 같다. 그는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배우던 14세 되던 해에 장남의 조혼 풍습에 따라 강진읍 도원리 김 검사의 딸 16세 김은하와 결혼한다. 그러나 첫 부인인 김은하는 당시 동남아 일대에 만연하던 유행성 감기에 걸려 결혼한 지 2년만에 세상을 뜬다. 비록 철모르던 나이에 아버지의 권유에 못 이겨 결혼했지만, 그는 절세 미인인데다가 누나처럼 포근한 첫 부인을 몹시 사랑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의 죽음은 어린 영랑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오면서 그의 시심 속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는 계기가 된다. [님 두시고]·[그 색시 서럽다]·[쓸쓸한 뫼 아페] 등이 그녀의 죽음과 관련된 시들이다.
쓸쓸한 뫼 아페 후젓이 안즈면
마음은 갈안즌 양금줄가치
무덤의 잔듸에 얼골을 부비면
넉시는 향맑은 구슬손가치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어 산골로 가노라
[쓸쓸한 뫼 아페](원문 인용, 띄어쓰기 필자)
또 그의 집안 조카이자 동향의 문우였던 김현구는 그녀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조시(弔詩) [M부인의 추억]·[M부인에게]·[어린 너는 산새처럼 가버리고]를 써서 영랑에게 바쳤다. 첫 부인을 사별한 영랑은 2년 후인 18세 때 이화여전을 나와 그의 집에서 하숙하던 강진보통학교 여교사인 미모의 마재경과 열애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와의 사랑은 영랑이 일본 유학길에 오르면서 오래 가지 못하고 끝을 맺는다.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그는 22세 되던 해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정지용 등 문우들과 태화관 등에서 친교를 맺는 동안 최승일의 누이 동생인 숙명여학교 2학년 최승희(당시 13세, 나중에 조선 무용계의 여왕인 된 그녀는 좌파 문인인 안막과 결혼 후 월북)와 약 1년간 목숨을 건 사랑에 빠진다. 영랑의 여동생 김순례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그는 1년 중 6개월은 서울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최승희와의 사랑도 양가 부모들의 반대에 부딪쳐 결실을 맺지 못한다. 영랑의 집안에서는 "그런 경성의 신여성은 우리 가문에 필요 없다"는 이유로, 최승희의 집안에서는 영랑의 지방색을 들어 각각 반대했다고 한다. 이때 영랑은 실연의 충격을 못 이긴 채 생가의 동백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발각되어 목숨을 건진다. 그리하여 영랑은 그 다음 해 숙부의 중매로 개성 호수돈여고를 나와 교편 생활을 하던 김귀연과 재혼한다.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의 주례로 개성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들은 이후 슬하에 7남 3녀(2남인 김현복은 생후 1년 뒤 사망)를 두게 되니 김귀연은 호적상 본부인이 된 셈이다.
그러나 강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로도 영랑은 서울의 명월관과 태화관에서 만난 여자들을 비롯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녀들의 경우도 이복이 섞인 관계로 서로 화해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재 그의 자녀 중 국내에 살고 있는 사람은 단국대 김현태 교수(5남)가 유일하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5.11.16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2079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