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류 문화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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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주류 문화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시대별 술의 역사

2. 전통주 개요

3. 전통주의 분류

4. 민속주의 종류와 제조방법

5. 지역별 민속주

6. 조상들의 월별 음주풍속

7.  절기별 전통주

8. 한국의 위스키

9. 음주의 예절과 풍속

10. 시대에 따른 음주문화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히 관대해졌다. 조선 시대의 술좌석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행동도 아무런 제재 없이 행해졌다.
매스컴을 통한 술의 광고나 선전 활동도 사람들의 폭주에 많은 기여를 한 것 같다. 술 마시는 것에 대한 제약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도한 정부의 대민정책 중 하나에는 ‘술 마시고 심각한 정치 문제는 잊어버리라.’는 것도 있었다. 주세에 있어서 막걸리와 소주는 서민의 술로 취급을 해왔다. 70년대 초반 히트를 친 ‘한 잔의 술’이라는 대중가요 가사를 보면 당시 음주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마시자 한 잔의 술, 마시자 마셔 버리자.’ 걱정을 쓸어버리자는 것이었다. 급작스레 단절되어 가는 전통의 가치관과 새 시대의 문화적 충격 속에서 생기는 고민을 술로 씻어버리기 위해서는 통음이 필요했나 보다. 당시 한국 사람들의 눈에는 술이 어떻게 비쳤을까? 마시면 취하는 것이었을까, 취하면 골치 아픈 일을 잊는 것이었을까. 70년대 중반 대학의 체육행사나 축제 등에 술이 널려 있었다. 누구나 술을 마시는 것이 인사처럼 되었고 그것도 빨리 마시는 게 잘하는 것인 양 여겨졌다. 바로 앞 세대의 사람들은 먹는 것이 충분치 않아 실컷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시대적 보상 심리에서였을까. 직장인들과 자영업자들은 경기 호황의 붐을 타고 사업상 술을 마셨다. 팽창되는 인력 수요와 일감을 맞추기 위하여 늦게까지 일하고 나서 짧은 시간에 술을 마셔야 되기 때문이었나 보다. 더구나 당시에는 밤 12시부터 아침 4시까지 통행금지였는데 이것이 폭음을 조장하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당시의 지식인들 중 반체제 인사들은 군사 독재에 항거하며 술을 마셨다. 그들은 마치 일제시대의 우국지사들이 느꼈던 것 같은 분노를 삭이기 위하여 술을 폭음했다. 저항인들의 대변자들이었던 소위 창비 문인들은 하루에 소주 2∼3병 마시는 것이 일상사였다 한다. 이때 주로 마시던 술은 막걸리, 소주였다. 70년대 말에는 맥주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전통 주막과 소주 집에서 서구화된 맥주집이 늘어났고 가정 소비도 꾸준히 늘었다. 60∼70년대는 경제 도약과 더불어 술을 마구잡이로 마신 취함의 시대라 생각된다.
4) 접대 음주시대(1980년대)
80년대에 들어 대중주인 막걸리의 소비량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맥주의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또한 진, 보드카 및 위스키의 소비량이 급격히 늘었다. 특히 이때의 특징은 주류 소비의 고급화가 진행되었고 접대주의 비중이 커진 점이다. 고급 술집은 삼국시대로부터 서민들과는 상관없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왔다. 이곳에서 권세가들이 정치적 담론을 해왔고 그들만의 여흥을 즐겼다. 그러나 70년대 말부터 이런 식의 술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니 바로 룸살롱이다. 특수 계층만 드나들던 고급 술집에 대중이 드나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제반 법 규정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또한 경제적인 성취에 대한 사회 문화적인 뒷받침이 없어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파생된 것이 바로 비뚤어진 접대 문화였다. 합리적인 방법으로는 일이 처리되지 않으니 향응을 베풀어 뒷거래를 하여 일을 성사시키기 위함이다. 접대주는 최고의 술과 최고의 서비스를 요한다. 따라서 당시 최고의 술이던 위스키와 접대부의 수요가 급증했다. 접대부 조달을 싸고 인신매매가 큰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기 이르렀다. 80년대에는 룸살롱, 스탠드 바, 카페 등의 업태가 많이 늘었다. 이 모든 업태에는 접대 여성이 들끓었다. 1988년 올림픽을 전후하여 한국인들의 문화가 크게 변화했다. 정치적으로는 1987년 6·29 선언으로 군사 독재가 크게 약화되어 국민들의 요구는 거세졌다. 부동산 가격이 치솟아 근검절약의 미덕은 절벽 같은 절망에 부딪치게 되었다. 근로자들은 더 이상 양순한 무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올림픽 이후 사회 개방으로 사람들의 가치관은 소비 지향적으로 바뀌었다.
음주에 있어서도 사람들은 무절제한 폭음을 일삼았다. 주류 판매 업소는 더욱더 고급화, 대형화되었다. 사람들은 술의 참맛을 즐기기보다는 술을 통해 허영과 과시를 드러내기 위해 음주를 하였다. 80년대의 음주문화는 거품에 들뜬 사회가 만들어 낸 뭔가 비뚤어진 허구였다. 우리나라의 음주 문화사에서 가장 퇴락한 시대였다고 생각된다.
5) 신 음주문화의 형성(1990년대 이후)
90년대에 들어서 우리나라의 음주문화는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1991년 주류의 수입개방으로 고급 위스키나 브랜디로부터 값싼 와인과 맥주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술이 밀려왔다. 따라서 사람들은 세계 유수의 술에 대하여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한편 해외여행 자유화로 사람들이 세계 각지의 음주문화를 접할 기회가 늘어났다. 즉 우리의 음주문화도 세계화되어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0여 년간 성장과 개발 일변도로 치달아 온 한국 국민들은 점차 환경과 건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식문화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제 음식에 대한 인식이 양에서 질로, 영양에서 다이어트로 변화하였다. 술을 마실 때도 건강을 생각해서 덜 마시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마이카 붐(my car boom)도 한 몫을 하고 있다. 90년대에 불어 닥친 마이카 붐으로 음주와 운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음주운전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된 결과이다.
정부의 주류 정책에도 변화가 있었다. 1996년 모든 술에는 건강에 대한 경고 문구를 기재하도록 국민건강증진법에 규정하였다. 1993년에는 알코올 농도가 17% 이상인 술은 전파매체를 통한 광고 선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밖에 주류 판매업소 영업시간의 제한 등 주류의 과소비를 진정시킬 수 있는 정책을 쓰고 있다. 그리고 한국 경제의 구조적 불황으로 말미암아 소위 거품 경기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실속을 찾게 되었다. 주류 판매업태도 룸살롱에서 좀 더 개방적이고 저렴한 형태로 많이 이전되었으며, 접대부의 고용도 점차 줄어들고 있는 양상이다.
<참 고 문 헌>
원융희, 술술 풀어 쓴 지구촌 술 문화, 2000
원융희, 술 멋 맛, 2000
조정형, 우리 땅에서 익은 우리 술, 2003
허시명, 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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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37페이지
  • 등록일2005.11.28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2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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