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들이고 갱들의 역사이다. 이 영화 속에서 갱들의 역사가 뉴욕의 역사처럼 보일 수 있거나 그 거시성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은 뉴욕의 초창기 역사 자체가 깡패스러움을 동일하게 함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스코시즈의 영화 속에는 언제나 패배에 대한 자의식과 자기 조롱이 섞여 있다. 관객을 영화적인 엑스터시로 끌고 들어가는 것으로 치자면 스코시즈만한 감독이 또 누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의 주술에 걸려 끌려가다 어느 순간 갑자기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나 무언가 남는 비참함이 있다. 항상 무언가가 물려 있다.
‘갱스 오브 뉴욕’이 역사를 다루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폭력에서 희열을 만끽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갱들의 삶과 역사를 매혹과 혐오라는 두 고리로 붙들고 있는 스코시즈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이중성이다. 스코시즈의 영화에는 폭력에 대한 매혹이 떠나지 않고 있다. ‘분노의 주먹’의 피가 튀는 제이크 라모타의 얼굴에서조차 매혹이 남는다. 그 순간 제이크 라모타가 서 있는 사각의 링은 비열한 거리이며, 그는 거리를 헤매는 갱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스코시즈는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영화적 이미지로 창조해낸다. ‘갱스 오브 뉴욕’의 첫 장면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매혹을 폭력에서 느끼고, 폭력을 영화적으로 승화시키는 주술 속에서 관객은 무언가의 엑스터시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폭력의 세계를 바라보는 스코시즈의 눈은 혐오에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인물들을 비웃고, 때로는 파멸의 끝에까지 몰아넣는다. 결국, 세상을 구하기 위해 겁 없이 권총을 뽑아들었던 택시 드라이버의 삶은 세상의 움직임을 모르고 칼과 곡괭이를 든 파이브 포인츠의 갱들 어딘가에 끼어 있는 것이다. 스코시즈는 폭력의 이미지를 매혹으로 여기면서도, 조소와 파멸, 또는 착각이라는 서사의 귀결을 통해 그것을 철학적으로 경계한다. 그러면서 갱의 위치는 예수의 위치와 동일해지기도 하고, 예수는 갱이 되기도 한다. 또한 갱들의 역사는 뉴욕의 역사의 반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철학적인 경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종교성이다. 폭력에 대한 매혹이 영화적으로 창조되고 있다면, 그 폭력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철학적으로 종교화된다. 갱들을 하층계급과 동일시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그들의 저항의 역사를 재현하지 않는 것은 스코시즈가 그런 종교적 순응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를 하자면, 스코시즈는 언제나 관객을 홀려 황홀경 속에 목을 매게 한다. 그러나 그 순간 육체가 죽어간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그는 때때로 교수집행인처럼 담담하게 반복한다. 그리고 스스로도 교수집행인 또한 죽는다는 사실에 순응한다. 착각 속에 빠진 언더그라운드의 역사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갱스 오브 뉴욕>을 마틴 스코시즈는 마치 그런 섬뜩한 매혹과 혐오와 순응의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삶과 역사를 매혹과 혐오라는 두 고리로 붙들고 있는 스코시즈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이중성이다. 스코시즈의 영화에는 폭력에 대한 매혹이 떠나지 않고 있다. ‘분노의 주먹’의 피가 튀는 제이크 라모타의 얼굴에서조차 매혹이 남는다. 그 순간 제이크 라모타가 서 있는 사각의 링은 비열한 거리이며, 그는 거리를 헤매는 갱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스코시즈는 다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영화적 이미지로 창조해낸다. ‘갱스 오브 뉴욕’의 첫 장면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매혹을 폭력에서 느끼고, 폭력을 영화적으로 승화시키는 주술 속에서 관객은 무언가의 엑스터시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스코시즈의 영화 속에는 언제나 패배에 대한 자의식과 자기 조롱이 섞여 있다. 관객을 영화적인 엑스터시로 끌고 들어가는 것으로 치자면 스코시즈만한 감독이 또 누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의 주술에 걸려 끌려가다 어느 순간 갑자기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나 무언가 남는 비참함이 있다. 항상 무언가가 물려 있다.
‘갱스 오브 뉴욕’이 역사를 다루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폭력에서 희열을 만끽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갱들의 삶과 역사를 매혹과 혐오라는 두 고리로 붙들고 있는 스코시즈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이중성이다. 스코시즈의 영화에는 폭력에 대한 매혹이 떠나지 않고 있다. ‘분노의 주먹’의 피가 튀는 제이크 라모타의 얼굴에서조차 매혹이 남는다. 그 순간 제이크 라모타가 서 있는 사각의 링은 비열한 거리이며, 그는 거리를 헤매는 갱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스코시즈는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영화적 이미지로 창조해낸다. ‘갱스 오브 뉴욕’의 첫 장면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매혹을 폭력에서 느끼고, 폭력을 영화적으로 승화시키는 주술 속에서 관객은 무언가의 엑스터시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폭력의 세계를 바라보는 스코시즈의 눈은 혐오에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인물들을 비웃고, 때로는 파멸의 끝에까지 몰아넣는다. 결국, 세상을 구하기 위해 겁 없이 권총을 뽑아들었던 택시 드라이버의 삶은 세상의 움직임을 모르고 칼과 곡괭이를 든 파이브 포인츠의 갱들 어딘가에 끼어 있는 것이다. 스코시즈는 폭력의 이미지를 매혹으로 여기면서도, 조소와 파멸, 또는 착각이라는 서사의 귀결을 통해 그것을 철학적으로 경계한다. 그러면서 갱의 위치는 예수의 위치와 동일해지기도 하고, 예수는 갱이 되기도 한다. 또한 갱들의 역사는 뉴욕의 역사의 반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철학적인 경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종교성이다. 폭력에 대한 매혹이 영화적으로 창조되고 있다면, 그 폭력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철학적으로 종교화된다. 갱들을 하층계급과 동일시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그들의 저항의 역사를 재현하지 않는 것은 스코시즈가 그런 종교적 순응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를 하자면, 스코시즈는 언제나 관객을 홀려 황홀경 속에 목을 매게 한다. 그러나 그 순간 육체가 죽어간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그는 때때로 교수집행인처럼 담담하게 반복한다. 그리고 스스로도 교수집행인 또한 죽는다는 사실에 순응한다. 착각 속에 빠진 언더그라운드의 역사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갱스 오브 뉴욕>을 마틴 스코시즈는 마치 그런 섬뜩한 매혹과 혐오와 순응의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삶과 역사를 매혹과 혐오라는 두 고리로 붙들고 있는 스코시즈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이중성이다. 스코시즈의 영화에는 폭력에 대한 매혹이 떠나지 않고 있다. ‘분노의 주먹’의 피가 튀는 제이크 라모타의 얼굴에서조차 매혹이 남는다. 그 순간 제이크 라모타가 서 있는 사각의 링은 비열한 거리이며, 그는 거리를 헤매는 갱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스코시즈는 다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영화적 이미지로 창조해낸다. ‘갱스 오브 뉴욕’의 첫 장면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매혹을 폭력에서 느끼고, 폭력을 영화적으로 승화시키는 주술 속에서 관객은 무언가의 엑스터시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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