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문체반정의 문학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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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열하일기-문체반정의 문학사적 의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며

1. 문체반정(文體反正)

2. 박지원
2-1. 북학파로서의 그의 입지, 생애, 문학관, 관리관
2-2. 열하일기2-3. 열하일기 문체 파동

3. 문체반정의 문학사적 의미 재발견

본문내용

단순히 서적의 금수 조치만이 정조의 의도는 아니었으며, 금수 조치는 정조의 후기의 사건이다.
한편으로는 노론계의 젊은 인재들을 양성하여 시파를 형성하고, 학문화된 조선의 성리학에 대해서는 본래의 순정(純正)한 주자학으로의 회귀라는 이데올로기를 던져주어, 학문적 귀착점을 경학(經學)으로, 나아가 육경학(六經學) 내지 십삼경학(十三經學)으로 확대되게 한다. 이러한 정조의 궁극적인 문학론은, 비록 정치적 의도가 배어있기는 해도 국초 이래의 원론이 도문일치론(道門一致論)인 것이다.
다소 모순되기도 하고 일치되기도 하지만, 정조의 입장은 개인인 학자로서의 입장과 통치자인 공인으로서의 입장이 상충되는 갈등의 문제가 있었다. 특히 효종 시대 이후 국론화된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북벌론이 팽배한 가운데 양자의 입장을 조율하고 정당화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그의 정책이나 여러 가지 조치는 상당히 복합적이며 탄력성을 지녀야만 했고, 그를 위한 정치적 장치가 ‘문체반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실학자 박지원의 『열하일기』 파동이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문체반정을 통한 시파의 형성과 경학으로의 회귀는 분명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적 문제의 해결점이 될 수 있었지만, 정작 성립된 정치 세력 간의 조율과 조화에 실패하게 될 부작용이 있었으며, 나아가 변화하는 문물의 도입을 방해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 사이에 놓인 인물 중에 박지원이 있었던 것이다.
박지원의 소극적인 회답과 정조의 미적지근한 반응, 그리고 문체반정의 적발자들에게 부과된 낮은 수위의 징계는 분명 문체반정의 시국 한가운데에서 기묘한 것이다. 결국 박지원의 연암체나 이옥 등의 패관소품체와 같은 신문체들은 완전히 멸종하지 않고 후대에 그 자양분을 넘겨주어 육경에 근거한 고문체 등과 함께 오히려 조선 문학의 다양성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반 계급의 몰락을 예견하고 이용후생의 사상을 주장하는 개혁적 이상주의자 박지원과 개인과 공인, 변화와 순수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했던 정조의 입장을 먼저 이해한다면 이 작아 보이는 사건은 문체반정이라는 사건 자체에 대한 재인식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김명호, 『박지원 문학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소, 2001
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효형출판, 2001
허남욱, 「조선 후기의 문체 및 문체반정에 대한 연구」, 성신한문학회, 1995
홍한주, 『지수념서』, 아세아문화사, 1984
  • 가격1,0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6.01.13
  • 저작시기2006.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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