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역사를 바꾼 유럽의 고대-중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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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계 역사를 바꾼 유럽의 고대-중세 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역사속의 전쟁

Ⅱ.유럽사에 획을 긋는 전쟁들
1)최초의 동,서양의 충돌 - 페르시아 전쟁
(1)페르시아전쟁의 개요
(2)페르시아 전쟁의 원인
(3)페르시아전쟁의 영향
2)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펠레폰네소스 전쟁
(1)펠레폰네소스 전쟁의 개요
(2)펠레폰네소스 동맹과 델로스 동맹
(3)펠레폰네소스 전쟁의 결과
3)지중해의 패권을 잡아라-포에니 전쟁
(1)포에니 전쟁의 개요
(2)포에니 전쟁이 로마에 끼친 영향
4)동양과 서양의 접촉-십자군 전쟁
(1)십자군의 성립
(2)십자군의 경과
(3)십자군의 의미

본문내용

끝으로 지중해 남부는 로마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기원전 1세기 후반에는 동부 지중해 세계도 평정하게 되었다.
4)동양과 서양의 접촉-십자군 전쟁
(1)십자군의 성립
교황의 권위가 높아진 11세기는 봉건 제도의 기초 위에 서유럽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였다. 농업 생산의 증가로 상업이 발달하고, 이에 따라 새로운 도시가 각지에 생겨났다. 이러한 때 일어난 것이 십자군 운동이다.
현재 크리스트 교도들 사이에는 예수의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트 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7세기 이래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다. 11세기 후반에는 이슬람 교도인 셀주크 투르크 족이 소아시아에까지 진출하여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는 한편, 크리스트 교도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였다. 이 때 셀주크 투르크에게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받게 된 동로마 황제는 로마 교황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시의 교화 우르반 2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로마 제국에까지 교세를 확장하려 하였다. 그는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고, 같은 크리스트 교의 나라인 동로마 제국에 대한 지원과 이교도로부터의 성지 탈환을 호소하였다. 이에 감동된 각국의 제후와 기사들이 일제히 호응하므로써 십자군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096년부터 1270년가지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이 여러 차례 거듭되었다. 십자군 운동이 이렇게 오랫동안 대규모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서유럽인들의 열렬한 신앙심에 일차적 원인이 있었지만, 봉건 제도하에 사회가 안정되면서 경제적 발달과 함께 밖으로의 진출 의욕이 강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이탈리아의 상인들은 십자군을 이용하여 동방 무역의 확대를 꾀하였다.
(2)십자군의 경과
서유럽 각국에서 모여 온 제후,기사,농민 들은 가슴에 십자가 표시를 하고 성지 회복을 위한 원정길에 올랐다.
제1회 십자군(1096~1099)은 일단 목적을 달성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왕국을 세웠다. 얼마 후, 예루살렘이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을 받아 제2회 십자군(1147~1149)이 파견되었고, 다시 예루살렘이 점령한 이집의 살라딘을 치기 위하여 제3차 십자군(1189~1192)이 출정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돌아왔다.
제4회 십자군(1201~1204)은 동방 무역의 패권을 잡으려느 베네치아 상인들의 책동에 말려들어 엉뚱하게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였다.
제5회 십자군(1228~1229)은 이슬람 교도의 내분을 틈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으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제6회(1248~1254)와 제7회(1270)는 예루살렘이 아닌 이집트와 튀니스를 원정하고 돌아왔다.
이처럼 십자군의 원정은 7회까지 거듭되었는데, 일시적이나마 목적을 달성한 것은 두 번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종교적인 순수성을 잃고 정치적 야심이나 경제적 이익 추구에 기울어져, 마침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3)십자군의 의미
십자군 원정이 있은 2세기 동안 기독교의 서유럽과 비잔틴 제국, 이슬람의 근동 지역 사이의 접촉은 크게 강회되었다. 이는 레반트 지역에 1096년부터 1291년까지 존속한 기독교 공국들이 ‘우트르 메르 바다 건너편
’국가들과 유럽 사이의 여행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많은 서유럽인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이질성과 유사성을 경험하게 되었다. 또 공동의 적에 대한 전쟁의 결과로서 서부 유럽의 주민들은 점점 더 그들이 ‘기독교 왕국’이 라는 하나의 공동체속에 속해 있음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유럽사에서 처음으로 다양한 지역으로부터 로마 기독교도의 거대한 무리가 함께 모였던 것이다. 그들은 고귀한 이상의 수호 이외에도 다른 동기가 작용하고 통치자들과 ‘백성들’이 서로 다른 속셈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그들은 서로 얼마나 많이 다른지를 직접 경험했다. 즉 ‘거만한’프랑스인, ‘탐욕스러운’게르만인, '부정직한‘이탈리아인 식으로 말이다. 십자군 원정의 연대기에는 당시 형성되고 있던 상투적인 문구들로 가득하다. 십자군 원정을 기독교 문화라는 하나의 세계가 자체의 힘과 능력을 증명해 보였던 종교적 보편주의의 최고의 순간으로도 볼 수 있으면서도, 그 원정은 동시에 그러한 세계 속에서도 차기 존재하며 그것이 점점 증가하고 있음을 많은 유럽인들에게 각성시켰다.
Ⅲ.맺음
전쟁은 정복의 개념이기에 거칠고 위협적으로 와 닿는다. 한편 문화라는 이미지는 부드럽게 다가온다. 하지만 전쟁의 양식도 문화의 한 단면이고 그 안에서 이전 사회의 곯았던 부분이 터지거나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두 세력의 승부에 의해 문화의 우위가 결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전쟁의 승리만이 문화의 우위나 역사성의 우위를 두지는 않는다. 많은 정복왕조들이 전쟁을 통해 다른 국가를 삼키고도 문화적으로는 지배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동서양의 여러 예를 통해서 익히 보고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싹트는 국가가 역사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서 도시국가에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고, 로마는 포에니 전쟁을 통해서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고 대제국을 이루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역사 속에는 전쟁이 끓이지 않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이 뒷받침 되어 있어야 하며 또한 안정적인 사회적 기반과 기술력, 애국심도 있어야 했다. 그것들이 모두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했을 때 전쟁의 승리를 통해 더 크고 굳건한 국가로의 발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서양 고,중세사에서 뽑아 약술한 네 개의 전쟁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포에니 전쟁, 십자군 전쟁- 은 새로운 역사 주도세력의 등장과 교체를 의미한다. 몰락되어지는 세력과 새롭게 부상되어지는 세력이 교체되어지는 전쟁을 통해 강한국가를 이룩해야 하는 이유를 추론해본다.
<참고 문헌 >
Peter Rietbergen 유럽 문화사 (지와 사랑 : )
민석홍 西洋史槪說 (삼영사 : 2002)
고지기 세계사 (청년정신: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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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20
  • 저작시기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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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3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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