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결정론적 윤리학
2. 상대주의 윤리학
스피노자 비판
1. 자유론과 결정론의 모순
2. 감정통제의 한계
2. 상대주의 윤리학
스피노자 비판
1. 자유론과 결정론의 모순
2. 감정통제의 한계
본문내용
것인지를 그리고 그가 정욕에 의해서만 움직여지는 무지한 사람들보다 얼마나 나은지를 알 수 있다. 무지한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외적인 원인들에 의해서 요동되며 결코 영혼의 진정한 평안을 결코 즐기지 못할 뿐 아니라, 말하자면 산과 사물에 대해서 무지한 채로 산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는 존재하기를 멈춘다. 다른 한편, 지혜로운 사람은 좀처럼 마음이 동요되지 않으며 신과 사물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아니하며 항상 영혼의 진정한 평화를 누린다. 내가 입증해온 바와 같이, 이런 쪽으로 인도하는 길이 매우 어려워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은 발견될 수 있는 길이다. 그 길은 좀처럼 발견되지가 않기 때문에, 실로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구원이라는 것이 용이하게 손에 넣을 수 있고, 상당한 노력을 하지 않고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무시되는 일이 벌어질 수 가 있겠는가? 모든 숭고한 것들은 그것이 희귀한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스피노자 비판
1. 자유론과 결정론의 모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스토이즘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난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결정론과 자유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결치 않았다. 그는 만일 우리가 일어나는 일이 반드시 그렇게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이렇게 해서 "마음의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자연에 있는 모든 사건들이 결정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태도를 변경할 힘조차도 잃게 된다. 우리는 스피노자가 제안하는 태도를 취하기로 맘을 먹든지, 아니면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기로 맘을 먹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만일 후자라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
2. 감정통제의 한계
두 번째 어려움은 인간의 삶에 대한 넓은 시야 - 즉 그의 말을 빌리자면 "영원의 문맥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를 가져야 한다는 스피노자의 교설과 관련된 것이다. 때때로 이것은 따를만한 유용한 충고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사소한 원인으로 자신들의 감정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다른 때에는 그렇지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이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깊이 느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고 믿는다. 이 경우에 결코 그런 식으로 느껴서는 안 된다고 제안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가장 심오한 경험의 일부를 제거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그러므로 만일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쫓는다면 우리에게는 예술적 창조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보다 중요한 의미에서, 그러한 윤리는 인간성에 위배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스피노자 식의 관점을 택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불가능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그와 같은 윤리이론은 넓은 층에 걸친 지지와 영속적인 호소력을 가질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것이 실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의 운명이다.
스피노자 비판
1. 자유론과 결정론의 모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스토이즘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난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결정론과 자유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결치 않았다. 그는 만일 우리가 일어나는 일이 반드시 그렇게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이렇게 해서 "마음의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자연에 있는 모든 사건들이 결정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태도를 변경할 힘조차도 잃게 된다. 우리는 스피노자가 제안하는 태도를 취하기로 맘을 먹든지, 아니면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기로 맘을 먹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만일 후자라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
2. 감정통제의 한계
두 번째 어려움은 인간의 삶에 대한 넓은 시야 - 즉 그의 말을 빌리자면 "영원의 문맥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를 가져야 한다는 스피노자의 교설과 관련된 것이다. 때때로 이것은 따를만한 유용한 충고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사소한 원인으로 자신들의 감정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다른 때에는 그렇지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이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깊이 느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고 믿는다. 이 경우에 결코 그런 식으로 느껴서는 안 된다고 제안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가장 심오한 경험의 일부를 제거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그러므로 만일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쫓는다면 우리에게는 예술적 창조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보다 중요한 의미에서, 그러한 윤리는 인간성에 위배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스피노자 식의 관점을 택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불가능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그와 같은 윤리이론은 넓은 층에 걸친 지지와 영속적인 호소력을 가질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것이 실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의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