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의 붕괴와 그 역사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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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무신정권의 붕괴와 그 역사적 성격

1) 김준 정권
(1) 김준의 출세
(2) 김준의 집권

2) 임연·임유무 정권
(1) 임연의 출세
(2) 임연·임유무의 집권

3) 붕괴기 무신정권의 성격

본문내용

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임연에 의한 국왕 폐위는 대다수 조정 관료들이 임연정권에 등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기가 되었다고 본다.
원종 10년 12월 친위적 성격이 실패한 후 원종은 몽고의 군사를 빌어 임연을 제거하고 왕정을 복고하고자 하였다. 그동안 불안감 속에 사로잡혀 몽고와 항전할 준비를 하던 임연은 등창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임유무가 그 지위를 계승하였다.
3) 붕괴기 무신정권의 성격
최씨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金俊과 林衍 부자는 각기 교정별감이 되어 무신정치를 계속하였다. 이들도 역시 최씨집권자와 다름없이 왕권까지도 침해하는 초월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이런 점은 문무 원로 중심의 공식적인 정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 정권은 崔氏政權에 비하여 분명히 약체화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전형적인 무신정권이라 할 수 있는 최씨정권이 집권자의 확고한 지위와 독자적인 기구의 수립막대한 사병집단의 형성 그리고 강대한 경제력의 축적을 특징으로 하였는데 비하여, 김준임연은 그 모든 것이 이보다 약화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김준에서 임연으로 이어짐에 따라 더하여 갔던 것이다.
정계의 지지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김준은 각별히 군사력에 의존해서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무력장치로서의 사병은 최씨가의 그것에 비해서 훨씬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즉, 김준 정권의 군사적 기반 가운데 상당 부분은 다수의 무인 공신들에 의해 점유되었고, 이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또한 명문과의 혼인으로 얻은 정치적 기반과 삼별초의 군사력 위에 성립한 임연 정권 역시도 자체적인 기반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무신정권을 유지한 군사적정치적 기반이 미약해짐에 따라 무신집권자로서의 김준과 임연의 지위도 확고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김준이나 임연의 항몽책을 원종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점 등에서 이들과 국왕과의 관계가 최씨가의 정책을 무력하게 따를 수밖에 없던 이전의 왕권과는 사뭇 다르다 하겠다.
이 시기 왕권의 신장에 따른 또 하나의 변화는 무신정권을 몰락시킨 주체가 바로 국왕이었다는 점이다. 비록 임연과의 연합이 있기는 하였으나, 김준의 주륙을 원종과 그의 측근이 직접 모의하고 실행하였다. 무신정권의 종식을 의미하는 임유무의 제거도 원종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무신정권의 붕괴와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이었다. 항몽정책의 주동자는 무신정권이었으므로 몽고는 무신집권자에 대하여 압력을 가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무신정치로 무력화된 왕권은 대외적으로 몽고세력과 결합함으로써 강화되었고 대내적으로는 독자적인 무신정권의 지속을 방해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최씨정권의 몰락 자체도 장기간에 걸친 몽고와의 항쟁에 의한 내부적 분열이라 할 수 있고, 김준의 주륙도 결국은 그의 심한 독재와 항몽태도로 원종과의 사이가 나빠진 데 원인이 있었다. 더 나아가 임연정권은 그 스스로가 폐위한 원종을 몽고의 압력으로 복위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정치적 현실에 직면하면서, 그 몰락이 예고되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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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06
  • 저작시기2006.02
  • 파일형식한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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