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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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1. 부마민주항쟁의 발발배경
1. 정치적 배경
2. 경제적 배경
3. 사회적 배경
4. 국제적 배경
5. 부산의 배경
1) 사회구조적 배경
2)부산지역의 사회 운동 상황

2.부마민주항쟁의 전개과정
1. 10월 15일 상황
2. 10월 16일 상황
3. 10월 17일 상황
4. 10월 18일 상황
5. 이후 상황

3. 부마 민주항쟁의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의의
계엄령과 위수령 발동으로 부마항쟁은 일단 진압되었지만, 단순히 국지적인 항쟁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10월 16일의 이화여대 시위, 19일의 전남대 및 서울대 시위, 24일의 계명대 시위 등 전국 대학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면서 권력 내부의 내분을 촉발시켰다. 1026정변으로 유신체제는「독재자 없는 독재체제」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제 민주화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 일정에 올랐다는 암묵적 합의가 형성되어갔다. 그러나 항쟁의 성과와 과제는 전두환 신군부의 1212 쿠데타에 의해서 찬탈당하고 말았다. 그것은 권력의 반민주억압통치와 수탈구조에 대한 저항이 또 다시 좌절되는 불행한 우리 현대사의 서글픈 되풀이였다.
항쟁을 통하여 나타난 구호는「유신철폐」,「독재타도」외에「언론자유」,「학원자유」,「박정희 물러가라」,「야당탄압중지」,「김영삼총재 제명철회」,「부가가치세 철폐」등이었다. 계급적 성격의 주장이나 민족통일적 관점의 구호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구호의 기저에 있는 가치체계는 자유민주주의였다. 이런 점에서 부마항쟁의 기본성격은「반독재 민주항쟁」이었다고 보아진다. 그리고 부마항쟁의 발화점을 제공하면서 일정 국면동안 선도적 역할을 했던 것은 학생들이었다. 앞서 언급된 70년대 후반의 부산지역 운동세력의 조직적, 이념적 역량이 일정한 역할을 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까지 부산 운동권은 고립, 분산적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자체 역량강화나 재생산 구조확립에 주력하는 단계였다. 말하자면 대규모 도심항쟁을 조직적으로 이끌어 갈 지도부가 없는 가운데, 부마항쟁은 미조직 민중들의 자생, 자발적 저항과 참여에 의해서 증폭되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부마항쟁을 시민항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민중항쟁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당시 경찰발표나 언론 보도 등도 시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항쟁참여 시민의 대다수가 영세상인, 영세기업노동자, 반실업상태의 자유노동자, 접객업소 종사자, 도시 룸펜계층 및 무직자 등이었다. 이러한 점을 토대로 판단해볼 때, 부마항쟁의 선도투쟁은 학생들이 담당했지만, 도시빈민들을 중심으로 상당수의 중간층시민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민중’들이 호응, 참여함으로써 ‘민중주체’의 대규모항쟁으로 발전된 것이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부마항쟁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가) 항쟁의 목표는 인권보장 및 정치제도의 합리성을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체계가 반영된 유신체제의 독재정치타도였다.
(나) 항쟁의 주체세력과 지도부라는 면에서 부마항쟁의 특징은 뚜렷한 조직적 지도부가 없는 민중 주체의 자발적 시위였다.
(다) 투쟁방법의 면에서 경찰기관, 관공서, 언론기관에 대한 파괴, 방화, 투석, 화염병투척,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대응한 자위적 폭력은 상당정도 있었지만 무장투쟁과 같은 조직적 저항은 없었다.
(라) 항쟁의 결과라는 면에서 ‘미완의 항쟁’이었다. 항쟁이 직접적 목표한 유신체제는 붕괴되었지만 신군부세력의 쿠데타에 의해서 유신의 재판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의 역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가) 부마항쟁은 서슬 퍼렇던 긴급조치시대의 숨막히는 억압구조를 뚫고, ‘4월혁명’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인 민중항쟁의 지평을 열었다. 그런 점에서 부마항쟁은 70년대 반유신운동의 귀결점이자 총결산이었다. 즉, 100만인 서명운동, 민청학련 사건, 319선언, 국민연합등 재야, 학생, 지식인 중심의 민주화운동은 반유신운동의 중요한 마디를 이루면서 그 마지막 결산으로서 부마항쟁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마항쟁은 학생운동이나 소수 명망가들에게 국한되어 있던 70년대 민주화운동 보다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으며, 답보상태에 있던 민주화운동세력을 추동하면서, 80년대의 518민중항쟁과 6월 항쟁이라는 대규모 반독재 민주항쟁의 도래를 예고하고 향도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나) 한편 유신체제를 붕괴시킨 직접적 계기는 1026정변이라는 정권내부의 분열과 암투였고, 여기에 부마항쟁을 하나의 배경으로 치부하는 인식이 없지 않다. 이런 점에서 부마항쟁은 민주화운동사에서 그 위상을 높이 평가하기에는 곤란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권의 동요나 내부분열을 불러일으키기까지의 피지배 민중의 ‘지속적이고 심각한 저항’ 그 자체이다. 정권내부의 분열, 김재규의 저격에 의한 박정희 암살, 미국의 모종의 관련성에 대한 의혹 등은 모두 부마항쟁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필연의 구성적 계기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마항쟁은 민주주의를 위한 민중항쟁의 역사에서 당당히 한 장을 차지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부마항쟁, 1016정변, 1212 신군부쿠데타,「서울의 봄」, 517계엄령확대조치, 518민중항쟁은 연속적인 시계열을 구성하면서, 저항과 변동의 대립적 공존이라는 역동적 관계 속에서 진행된 한국 민주화의 가장 빛나는 한 시기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부마항쟁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무엇보다 ‘미완의 항쟁’이라는 규정속에 한계점이 함의되어 있다. 유신체제의 종말이 항쟁 그 자체의 힘이 아니라, 정권내부에 의해서 이루어짐으로서, 유신체제의 형식적 붕괴만을 가져왔으며, 따라서 유신체제의 망령은 신군부의 독재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그리고 항쟁의 확고한 지도중심이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초기부터 지도부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항쟁의 전개과정에서 지도부가 조직될 수 있을 것이다. 전개과정 역시 지도역량이 부재한 가운데 분산성, 자발성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도중심이 없었다는 것은 향후 항쟁의 성과나 과제를 담보하고 추동할 수 없는 역량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다. 부마항쟁의 한계는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통하여 일정정도 극복되었지만 반복되는 면이 없지 않았다.
※참고 자료
이행봉외, 민주항쟁연구논총, 민주공원 (2003)
김선미외, 부산민주운동사, 민주공원(2003)
박종성, 한국정치와 정치 폭력, 서울대학교(2001)
한국역사연구회, 한국현대사3, 도서출판 풀빛(1991)
한승헌 외, 유신체제외 민주화 운동, 춘추사(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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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06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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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36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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