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문
2. 시대적 배경 - <황금시대 Siglo de Oro>
3. 세르반테스의 생애
4. 작품의 구성 및 줄거리
5. 작품 < 돈키호테 >의 의도
6. 캐릭터 소설 - 인물 설정
7. 결론
2. 시대적 배경 - <황금시대 Siglo de Oro>
3. 세르반테스의 생애
4. 작품의 구성 및 줄거리
5. 작품 < 돈키호테 >의 의도
6. 캐릭터 소설 - 인물 설정
7. 결론
본문내용
을까지 결투에 참여하려고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보다 더 확실한 에로 삐달은 1591년부터 1597년까지 시리즈로 출간된 「민요의 꽃」에 실린, 어느 가난한 농부를 주인공으로 다룬 단막 희극이 돈키호테의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농부가 민담 기사 이야기에 미치고 끼하노가 기사 소설에 미친 것이 차이라면 차이겠지만 둘 다 기사로 나서서 스스로의 꿈을 실현하겠다고 했다가 참패를 당한 처지는 똑같다. 돈키호테의 첫 번째 출행과 아주 흡사한 이 민속 희극의 주인공은 그 잘못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 재수 없어서 졌다고 하는 것까지도 비슷하다.
이 이론이 사실이라면, 그럼 대체 왜 세르반테스는 이런 민담의 주인공에게 그리도 많은 열정을 쏟은 것일까?
우선 기사 소설이라는 환상적인 이야기에 반해서 그걸 사실로 믿고 미쳐 있는 무리들이 당시 사람들 중에 무척 많았다고 한 사실과, 세르반테스가 이런 사람들에 대해 지극히 반발적인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대답이 될 수 있을까 한다. 그래서 기사 소설을 사실로, 역사로 믿고 날뛰는 꼴이 사실과 거짓을 왜곡하게 만든다고 생각한 세르반테스는 자신을 포함해 이런 환상에 빠져 있는 무리들을 진실로 돌아오도록 바로 잡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비틀어진 것을 바로 잡고 잘못된 데를 고치겠다고 나선 것이 돈키호테라면 애초에 세르반테스의 의도는 그 반대였다. 즉, 그런 미치광이를 바로 잡고 거짓과 환상에 살고 있는 무리들을 정말로 깨우쳐 주겠다는 것이 세르반테스의 생각이었다. 그는 하나의 전형적인 미치광이 기사를 정말 우스꽝스럽게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인가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다짐한다. 우선 어떤 기사가 비웃을 만큼 미친 형태로 나와야 될텐데 그것이 우선 당장은 그의 머릿속에 구체화되지 못했던 시기였다. 만투아 후작의 설화가 귀에 들어온 게 바로 그 때였다. 이 단막 희극은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민요나 속담이 가득한 것이어서 열망에 들떠있던 그의 신경을 오래 전부터 자극해 왔던 게 분명하다. 이 모델을 따라 그는 어떤 시골 영감을 기사 소설에 미치게 하고 같은 방식으로 길거리에 내세운다.
이렇게 해서 5장까지 이끌어 가던 그는 문득 방랑 기사라는 것이 우스갯거리만이 아닌 하나의 살아 있는 뼈와 살을 가진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7장부터 돈키호테는 조금씩이나마 자기 인식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등장하는 산쵸 판사와의 관계는 돈키호테의 인간성 회복에 큰 영향을 준다. 돈키호테가 단순히 미치광이가 아닌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동반자 관계를 설립하게 되는 것이다.
산쵸 판사. 꿈이란 모르는 엄청난 먹기 주의자, 현실주의자의 출현은 돈키호테를 이상주의자로 채색하고, 인간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로 바뀐 것이다.
7. 결론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알론소 끼하노는 미친다. 돈키호테로 둔갑한다. 꿈을 현실로, 이상을 현실로, 과거를 오늘로 살겠다고 모험에 나선다. 신들린 상태의 돈키호테는 정신이 없다. 사리 판단이 흐리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안다. 자신이 필요한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있는지를 모를 뿐이다. 문학은 진리와 선악의 행방을 찾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찾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산쵸에게 말한다.
“산쵸야, 이 사람아. 둘시네아 공주가 계시는 궁전으로 나를 인도해다오.”
돈키호테의 길은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라 그 발걸음이 거쳐가는 미학적 향기의 과정에 있다. 이상주의와 물질주의와의 싸움, 꿈과 현실과의 싸움만으로 돈키호테를 보는 것은 돈키호테의 중요성을 너무 문학 밖의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 이전 소설의 주인공들은 주어진 직업과 환경 속에서 전형 화된 인물이었고 또 그것이 행동의 법칙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로부터 멀어지거나, 사회를 증오하거나, 사회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나름대로는 절망적인, 그러나 자유로운 삶을 꾸려나갈 공간을 마련한다. 그들은 주어진 행동 양식이 없고 각각 자신의 환경 속에 살아 있다. 살면서 바뀌고 성장하고 마음을 돌린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산쵸이다. 돈키호테가 자기의 미친 삶을 반성하고 죽어가자 이번에는 오히려 산쵸가 미친 돈키호테가 된다.
“아이고, 죽지 마세요, 주인님. 그리고 제 말을 좀 들어보셔요.
오래 사셔야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으로 할 일 중에서 가장 미친 것이 그냥 속 수무책으로 죽어 가는 거랍니다. 누구 하나 죽이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우울증에 사로잡혀 아무 일도 없이 죽어가다니요. 이보세요, 그 게으름 좀 작작 피우시고 어 서 일어나세요. 그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셔서 우리 지난 번에 약속한 대로 목동이 있는 들판으로 나갑시다요. 어쩌면 그 어느 풀덤불에서 마술이 풀리신 우리 둘시 네아 공주님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돈키호테의 죽음처럼, 아니, 알론소 끼하네의 죽음처럼 우리의 삶이란 죽음을 향하여 가는 길이다. 그러나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혐오한다. 죽기 원하는 사람은 없다.
돈키호테는 미쳐서 살았다. 산다는 것은 미쳐서 사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이유는 간단하다. 삶은 움직이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미쳐서 그는 존재를 회복했다. 그런 그의 존재는 문학으로, 예술로 승화되었다. 진정한 삶과 예술이 만나는 자리가 바로 그런 돈키호테의 미쳐서 사는 순간이었다. 돈키호테는 미쳐서 사는 것이 삶이며 예술이며 세속적 관념에 물들어 사는 것은 바로 그 순간부터 죽음이라는 것을 넌지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가 그렇게 찾았던 기독교의 주님의 약속과도 같이 미쳐서 살았기에, 삶에 미쳐서 삶을 얻었기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 순교자들이 하늘에서 영생을 얻었다면, 돈키호테는 땅에서 영생을 얻는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삶이 어느 종교인의 삶보다 고통스럽고 험악한 좁은 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끝없이 미쳐서 살아야 하는, 깨어나면 곧 죽는 또다른 극한 투쟁 속의 숭엄한 길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미쳐 있는 동안 영원한 삶의 광장에 있다. 그래서 그는 불멸이다. 죽는 것은 알론소 끼하네일뿐이다. 그는 문학으로서의, 예술로서의, 삶이다.
이 이론이 사실이라면, 그럼 대체 왜 세르반테스는 이런 민담의 주인공에게 그리도 많은 열정을 쏟은 것일까?
우선 기사 소설이라는 환상적인 이야기에 반해서 그걸 사실로 믿고 미쳐 있는 무리들이 당시 사람들 중에 무척 많았다고 한 사실과, 세르반테스가 이런 사람들에 대해 지극히 반발적인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대답이 될 수 있을까 한다. 그래서 기사 소설을 사실로, 역사로 믿고 날뛰는 꼴이 사실과 거짓을 왜곡하게 만든다고 생각한 세르반테스는 자신을 포함해 이런 환상에 빠져 있는 무리들을 진실로 돌아오도록 바로 잡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비틀어진 것을 바로 잡고 잘못된 데를 고치겠다고 나선 것이 돈키호테라면 애초에 세르반테스의 의도는 그 반대였다. 즉, 그런 미치광이를 바로 잡고 거짓과 환상에 살고 있는 무리들을 정말로 깨우쳐 주겠다는 것이 세르반테스의 생각이었다. 그는 하나의 전형적인 미치광이 기사를 정말 우스꽝스럽게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인가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다짐한다. 우선 어떤 기사가 비웃을 만큼 미친 형태로 나와야 될텐데 그것이 우선 당장은 그의 머릿속에 구체화되지 못했던 시기였다. 만투아 후작의 설화가 귀에 들어온 게 바로 그 때였다. 이 단막 희극은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민요나 속담이 가득한 것이어서 열망에 들떠있던 그의 신경을 오래 전부터 자극해 왔던 게 분명하다. 이 모델을 따라 그는 어떤 시골 영감을 기사 소설에 미치게 하고 같은 방식으로 길거리에 내세운다.
이렇게 해서 5장까지 이끌어 가던 그는 문득 방랑 기사라는 것이 우스갯거리만이 아닌 하나의 살아 있는 뼈와 살을 가진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7장부터 돈키호테는 조금씩이나마 자기 인식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등장하는 산쵸 판사와의 관계는 돈키호테의 인간성 회복에 큰 영향을 준다. 돈키호테가 단순히 미치광이가 아닌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동반자 관계를 설립하게 되는 것이다.
산쵸 판사. 꿈이란 모르는 엄청난 먹기 주의자, 현실주의자의 출현은 돈키호테를 이상주의자로 채색하고, 인간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로 바뀐 것이다.
7. 결론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알론소 끼하노는 미친다. 돈키호테로 둔갑한다. 꿈을 현실로, 이상을 현실로, 과거를 오늘로 살겠다고 모험에 나선다. 신들린 상태의 돈키호테는 정신이 없다. 사리 판단이 흐리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안다. 자신이 필요한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있는지를 모를 뿐이다. 문학은 진리와 선악의 행방을 찾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찾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산쵸에게 말한다.
“산쵸야, 이 사람아. 둘시네아 공주가 계시는 궁전으로 나를 인도해다오.”
돈키호테의 길은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라 그 발걸음이 거쳐가는 미학적 향기의 과정에 있다. 이상주의와 물질주의와의 싸움, 꿈과 현실과의 싸움만으로 돈키호테를 보는 것은 돈키호테의 중요성을 너무 문학 밖의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 이전 소설의 주인공들은 주어진 직업과 환경 속에서 전형 화된 인물이었고 또 그것이 행동의 법칙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로부터 멀어지거나, 사회를 증오하거나, 사회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나름대로는 절망적인, 그러나 자유로운 삶을 꾸려나갈 공간을 마련한다. 그들은 주어진 행동 양식이 없고 각각 자신의 환경 속에 살아 있다. 살면서 바뀌고 성장하고 마음을 돌린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산쵸이다. 돈키호테가 자기의 미친 삶을 반성하고 죽어가자 이번에는 오히려 산쵸가 미친 돈키호테가 된다.
“아이고, 죽지 마세요, 주인님. 그리고 제 말을 좀 들어보셔요.
오래 사셔야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으로 할 일 중에서 가장 미친 것이 그냥 속 수무책으로 죽어 가는 거랍니다. 누구 하나 죽이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우울증에 사로잡혀 아무 일도 없이 죽어가다니요. 이보세요, 그 게으름 좀 작작 피우시고 어 서 일어나세요. 그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셔서 우리 지난 번에 약속한 대로 목동이 있는 들판으로 나갑시다요. 어쩌면 그 어느 풀덤불에서 마술이 풀리신 우리 둘시 네아 공주님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돈키호테의 죽음처럼, 아니, 알론소 끼하네의 죽음처럼 우리의 삶이란 죽음을 향하여 가는 길이다. 그러나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혐오한다. 죽기 원하는 사람은 없다.
돈키호테는 미쳐서 살았다. 산다는 것은 미쳐서 사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이유는 간단하다. 삶은 움직이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미쳐서 그는 존재를 회복했다. 그런 그의 존재는 문학으로, 예술로 승화되었다. 진정한 삶과 예술이 만나는 자리가 바로 그런 돈키호테의 미쳐서 사는 순간이었다. 돈키호테는 미쳐서 사는 것이 삶이며 예술이며 세속적 관념에 물들어 사는 것은 바로 그 순간부터 죽음이라는 것을 넌지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가 그렇게 찾았던 기독교의 주님의 약속과도 같이 미쳐서 살았기에, 삶에 미쳐서 삶을 얻었기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 순교자들이 하늘에서 영생을 얻었다면, 돈키호테는 땅에서 영생을 얻는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삶이 어느 종교인의 삶보다 고통스럽고 험악한 좁은 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끝없이 미쳐서 살아야 하는, 깨어나면 곧 죽는 또다른 극한 투쟁 속의 숭엄한 길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미쳐 있는 동안 영원한 삶의 광장에 있다. 그래서 그는 불멸이다. 죽는 것은 알론소 끼하네일뿐이다. 그는 문학으로서의, 예술로서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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